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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극장, “홍 선장이 부른다, 인생역전”
인간극장, “홍 선장이 부른다, 인생역전”
  • 정진욱 기자
  • 승인 2020.03.29 07: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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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인간극장
사진 = 인간극장

 

[스페셜타임스 정진욱 기자] 인생이란 어쩌면 곡절과 시련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강원도 동해시의 작은 항구 ‘묵호항’, 이곳에 수많은 인생 굴곡을 경험한 문어잡이 배 선장이 있다. 꼭두새벽부터 1.5톤의 작은 배를 몰고 바다를 누비며 자신의 굴곡진 삶을 노래하는 선장, 홍현표(52) 씨가 그 주인공.

 

해도 곤히 잠들어있는 새벽, 잠에서 깬 현표 씨는 제일 먼저 어머니, 김복자(89) 할머니의 숨소리를 확인한다. 노모를 홀로 집에 두고 바다로 떠나는 것은 아무리 반복해도 편치 않은 일. 몇 번이고 어머니를 살펴봐야 안심이 된다는 그는 그제야 낡고 작은 배를 몰고 바다로 나선다.

 

바다 환경을 생각해 통발 조업을 하지 않는 이곳에서 홍 선장은 오롯이 혼자서 배를 운전하며 40여 개의 낚싯대까지 관리한다. 끼니를 챙길 틈도 없이 바쁜 것은 물론, 까딱하면 망망대해에서 조난당할 수 있어 늘 긴장해야 하는 위험한 작업이 계속되는데...하지만 지나온 삶에 비하면 이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홍 선장.

 

배고팠던 젊은 시절, 현표 씨는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5년의 직업군인 생활과 보험설계, 방문판매, 농사에 건설현장 일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던 그였다. 그저 남들만큼 살고 싶었을 뿐인데... 정신없이 세상살이를 겪어내다 보니, 어느덧 40대 후반이 된 그는 두 번의 결혼 실패에 교통사고로 몸까지 망가져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25년 만에 다시 찾은 고향의 바다처럼 풍랑이 심하고 모질었던 삶.그런 현표 씨의 눈에 문득 여든을 훌쩍 넘긴 홀어머니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제야 번쩍 정신이 든 현표 씨는 더 이상 어머니를 실망시킬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재활에 매진했고 다시 한 번 일어나기 위해 문어잡이를 배웠다. 게다가 1년 전, 어린 시절부터 일이 고될 때마다 불렀던 노래가 동해시의 작은 가요제부터 ‘KBS 전국노래자랑’에서까지 인정받게 되면서, 가수로 데뷔하게 된 현표 씨. 오늘도 바다 한 가운데에서 울려 퍼지고 있을 그의 노래를 소개한다! ‘홍 선장이 부른다, 인생역전!’

 

딸 같은 아들, 홍 선장의 ‘엄마하고 나하고’ 

 

강원도 동해시의 작은 항구, ‘묵호항’은 문어 산란기가 다가오는 봄철이 되면 더욱 분주해진다. 평생을 바다에서 보낸 토박이들도 긴장해야 하는 바쁜 시기.

 

이제 갓 문어잡이 5년 차가 된 홍현표(52) 선장은 주변 베테랑 선장보다 곱절로 준비해도 부족할 상황이다.

 

그럼에도 현표 씨에겐 무엇보다 어머니를 살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 

 

매일 새벽 네 시, 잠에서 깬 현표 씨는 제일 먼저 어머니, 김복자 할머니(89)의 안위부터 몇 번이고 살핀다. 

 

보통의 통발 조업과 다르게 낚시로 문어를 잡는 이곳에서는 선장이 혼자서 배를 운전하고 40개의 낚싯대도 관리한다.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하는 일이기에 정신없이 바쁜 것은 물론, 늘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 그런 와중에도 노모가 식사는 잘하셨는지, 오늘 불편한 점은 없으신지 궁금해 틈만 나면 전화하기 일쑤. 그렇게 8시간 남짓의 힘든 조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현표 씨는 잠시 쉴 틈도 없이 어머니를 위해 점심상을 차린다. 

 

사실 현표 씨가 고향에 돌아오기 전,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홀로 생활하던 어머니는 관절이며 못 곳곳 성한 데가 없었다. 한 해에도 열 번 넘게 병원에 입원해야 했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투박한 솜씨지만 매일 정성을 다해 상을 차리는 막내아들의 밥상을 마주한 이후 어머닌 몰라보게 건강을 회복하셨다. 무엇보다 어머니를 힘 나게 하는 것은 현표 씨의 노래다. 막내아들이 뽑아내는 구성진 가락을 듣고 있노라면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다는 어머니. 그런 막내아들의 따뜻한 밥상과 재롱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안쓰럽고 서글퍼지기도 하지만 늘 ‘딸 같다’며 배시시 웃으신다!

 

대학 시절 호텔조리학을 전공했던 현표 씨는 가난했던 집안을 위해 더 안정적인 직업을 찾기로 결심했다. 덩치도 좋았고 운동도 곧잘 했던 그는 주변의 권유로 군인의 길을 선택했고, 삼사관학교에 입교했다. 육군 특수부대 장교로서 명예로운 군 생활을 보내던 중, 첫 번째 아내를 만났고,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딸을 얻었다. 하지만 대위로 전역할 무렵, 새 직장을 준비하기도 부족한 시간에 작전에 투입되었던 그.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니 준비할 겨를도 없이 바로 사회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자신감 하나로 부딪치기엔 세상은 녹록치 않았고, 연이은 사업 실패로 결국 가정은 무너졌고 하나뿐인 딸과도 생이별을 해야 했다. 

 

그렇게 아픔을 딛고 안산에서 보험설계, 방문판매, 건설현장 막노동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던 현표 씨. 고된 일들의 연속이었지만 낙오되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생기를 되찾았다. 주어진 삶에 적응해 나가던 현표 씨는 옆에서 자신을 이해해주고 응원해줬던 지인과 자연스레 새로운 가정을 꾸렸고 새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던 5년 전, 설상가상 그는 끔찍한 사고를 겪었다. 전국을 돌며 배추 뽑는 일을 하던 중 진도에서 운전하던 트럭이 전복된 것. 척추가 골절되고 이가 다섯 개나 부러졌을 만큼 큰 사고였다. 사고 이후로 16년간 결혼생활을 이어왔던 두 번째 아내와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그저 남들만큼 살고 싶었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노력해 왔던 그였는데... 또 다시 실패를 맛보게 됐던 것. 

 

삶을 모두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참한 실패였다. 망연자실, 현표 씨는 빈털터리가 되어 어머니가 계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런 현표 씨의 눈에 비친 어머니의 모습은 고향을 떠나기 전과 많이 달라져있었다. 곱디 고왔던 얼굴에는 주름이 내려앉았고, 흥 많고 당찼던 어머니는 온데간데없고 허리 굽은 꼬부랑 할머니만이 남아 있었다. 번쩍 정신이 든 현표 씨는 자신에게 아직 지켜야 할 가족이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단다. 그날로 고향을 지키고 있던 다섯째 형님에게 찾아가 ‘스승님’이라 부르며 악착같이 문어잡이 일을 배웠고, 6개월 만에 혼자 배를 빌려, 바다로 향했다.

 

사실 어려서부터 끼가 많았던 현표 씨는 늘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당장 가정의 생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했던 현표 씨는 가수라는 꿈을 가슴속 한 켠에 묻어 두고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현표 씨는 바쁜 삶을 지속하는 가운데에도 틈만 나면 각종 가요제를 찾아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젊어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온갖 모진 풍파를 겪고 나니 그가 뽑아내는 곡조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2년 전, 동해시에서 열린 KBS <전국노래자랑>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난 후 본격적으로 트로트 가수 생활에 뛰어들었다.

 

업계에서 나름의 인정도 받고 팬들도 생겨 꿈을 향해 욕심을 부릴 만도 하건만, 현표 씨는 지켜야 할 가족이 있기에 지금을 만족하며 묵묵히 생업으로 돌아왔다. 매일 같이 조업을 나가 바다가 주는 만큼만 문어를 잡고, 생활비가 부족할 때면 고깃집으로 달려가 뜨거운 불판을 나르고 고기 손질까지 하며 기꺼이 온갖 허드렛일을 맡는다.

 

게다가 일주일에 두 번, 현표 씨는 마을의 복지회관을 찾아 노래를 부르고 치매 노인의 수발을 들어주며 베푸는 삶도 잊지 않는다. 연말을 맞아 펼쳐지는 각종 행사와 공연에서도 보수를 가리지 않고 무대를 찾아다닌다.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노래라면 고향의 어른들에게도 분명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 25년 이상 떠나 있었던 고향이지만,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받아주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것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작은 보답이다. 인생의 풍랑에 지쳐 있던 그에게 삶의 이유를 되찾게 해준 어머니와 고향 바다를 위해서, 홍 선장은 오늘도 무대에 오른다.

jinuk@specia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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