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세대 아마추어 공연 활동 확산…생애 후반 여가 문화로 자리잡아

평일 오후 2시, 서울 시내의 한 구민회관 연습실에 기타 선율과 함께 중저음의 합창 소리가 울려 퍼진다. 모인 사람은 대부분 50대 후반에서 60대 중반이다. 몇 달 전까지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던 이들이 이제는 발성 연습을 하고 무대 동선을 외운다. 퇴직 이후 삶의 중심을 무대로 옮긴 이들의 모습은 더는 낯선 풍경이 아니다.

연습실 한쪽 벽에는 다음 달 있을 지역 축제 공연 일정표가 붙어 있고, 그 옆에는 단원들이 직접 적어 넣은 출석 체크표가 빼곡하다. 지휘를 맡은 강사는 "처음 시작할 때는 음정조차 잡기 힘들어하던 분들이 몇 달 만에 화음을 맞추는 모습을 보면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연습이 끝난 뒤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다음 곡 선정을 두고 의견을 나누는 모습도 눈에 띈다.

최근 몇 년 사이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한 아마추어 공연단이 눈에 띄게 늘었다. 지역 문화센터나 구청 평생학습관에서 운영하는 합창단, 연극반, 사물놀이반 등은 매 모집 시기마다 정원을 넘기는 지원이 몰린다. 과거 노인정 중심의 소일거리 성격이 강했던 시니어 여가 활동이 이제는 공연이라는 목표를 가진 본격적인 취미 생활로 바뀌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 지역 문화재단 관계자는 "5년 전만 해도 중장년 대상 프로그램은 서예나 요가 같은 정적인 강좌 위주였다"며 "최근에는 무대에 직접 서는 공연 프로그램에 신청자가 몰려 추가 강좌를 개설하는 경우가 늘었다"고 전했다. 실제로 일부 지역에서는 합창단 모집 공고가 올라온 지 하루 만에 정원이 마감되는 사례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통계청이 발표한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은퇴 이후 여가 시간을 문화예술 활동에 할애하는 비율은 과거에 비해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특히 베이비붐 세대가 본격적으로 은퇴 연령에 접어들면서 이들의 문화적 수요가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교육 수준과 문화 소비 경험을 갖고 있어,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차원을 넘어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활동을 찾는 경향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내놓은 여가 활동 관련 조사에서도 50대 이상 응답자 가운데 공연·예술 활동 참여 의향이 있다고 답한 비율이 다른 연령대에 비해 높게 나타난 바 있다. 연구원 관계자는 "은퇴 세대가 수동적인 관람객을 넘어 직접 무대에 서는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원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퇴직 후 합창단에 들어간 김모 씨(61)는 입단 당시를 떠올리며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하루가 너무 길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에는 단순히 시간을 보내려고 시작했는데 공연 날짜가 잡히고 나니 연습에 더 집중하게 됐다"며 "무대에 서서 박수를 받는 순간 퇴직 이후 처음으로 다시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고 전했다. 김씨는 요즘도 일주일에 세 차례씩 개인 연습을 하며 다음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연극반에 참여하는 박모 씨(58)의 사정도 비슷하다. 그는 평생 영업직에 종사하다 은퇴한 뒤 우연히 지역 문화센터 강좌 안내문을 보고 연극반에 등록했다. 박씨는 "대사를 외우는 게 쉽지 않아 처음엔 포기할까 고민했다"면서도 "같은 처지의 동료들과 함께 연습하면서 서로 의지가 됐고 공연이 끝난 뒤의 성취감은 직장에서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만족감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연습 과정에서 사귄 동료들과 공연이 끝난 뒤에도 따로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며 "무대보다 그 과정에서 생긴 인간관계가 더 큰 자산이 됐다"고 말했다.

사물놀이반에 참여하는 이모 씨(64)는 "젊었을 때는 전통 악기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며 "퇴직 후에야 비로소 꿈꾸던 걸 해볼 여유가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매주 두 차례 연습에 참여하며 지역 행사에 초청받아 공연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흐름을 생애주기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본다. 한 복지학 연구위원은 "은퇴는 단순히 경제활동의 중단이 아니라 사회적 역할과 정체성의 변화를 동반하는 사건"이라며 "공연 활동은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고 집단 안에서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경로"라고 말했다. 이어 "특히 합창이나 연극처럼 여러 사람이 함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활동은 고립감을 줄이는 데 효과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덧붙였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은퇴 후 우울감이나 무력감을 호소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전했다. 그는 "은퇴 이후 사회적 관계망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정서적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며 "규칙적으로 모여 연습하고 공연이라는 구체적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활동은 생활 리듬을 유지하고 정서적 안정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개인의 신체적 여건이나 건강 상태에 따라 무리한 활동은 피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전문가와 상담을 거쳐 활동 강도를 조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무대에 서는 경험 자체가 자존감 회복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며 "특히 장시간 발성이나 움직임이 필요한 활동은 체력 안배가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지자체와 문화기관들도 이런 수요에 발맞춰 관련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분위기다. 일부 지역 문화재단은 중장년 전용 공연 프로그램을 별도로 편성하고, 연말에는 지역 축제나 경로당 초청 공연 등 실제 무대에 설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단순한 동호회 활동을 넘어 지역 공연예술 생태계의 한 축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일부 지자체는 전문 연출가나 작곡가를 초빙해 중장년 공연단의 완성도를 높이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한 문화센터 담당자는 "단순히 취미로 끝나지 않고 지역 축제 개막 공연이나 복지관 정기 공연에 설 수 있도록 커리큘럼을 짜고 있다"며 "참가자들의 만족도가 높아 매년 강좌를 늘리는 추세"라고 말했다.

다만 이런 활동이 모든 은퇴자에게 동일한 만족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한 평생교육 관계자는 "공연 활동에 대한 관심과 체력, 경제적 여건은 개인마다 차이가 크다"며 "모든 은퇴자가 같은 방식의 여가를 선택할 필요는 없으며, 각자의 상황에 맞는 활동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부 참가자들은 공연 준비 과정에서의 체력적 부담이나 시간 투입에 부담을 느껴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 일부 지역에서는 참가비나 의상 비용 등 경제적 부담 때문에 참여를 망설이는 경우도 있다고 담당자들은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장년층의 아마추어 공연 활동은 지역 사회 곳곳에서 꾸준히 모임을 늘려가고 있다. 구청과 주민센터, 평생학습관을 중심으로 신규 단원 모집 공고가 이어지고 있으며, 일부 합창단은 대기자 명단을 따로 관리할 정도로 수요가 몰리고 있다. 은퇴 이후 무대라는 또 다른 삶의 영역을 찾은 이들의 발걸음은 올가을에도 연습실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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