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비 분담과 지하주차장 화재 우려 두고 입주민 이견 팽팽

서울의 한 1000세대 규모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는 최근 몇 달째 전기차 충전시설 증설 안건을 두고 표류하고 있다. 전기차를 보유한 입주민들은 충전 자리가 부족해 매일 아침 충전 전쟁을 치른다고 호소하지만, 비전기차 가구들은 공용 관리비로 설치비를 분담하는 데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결국 이 단지는 설치 비용을 둘러싼 표결을 세 차례나 연기했다. 입주자대표회의 관계자는 "매번 안건을 올릴 때마다 비용 분담 방식에 대한 이의 제기가 쏟아져 의결 정족수를 채우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환경부와 국토교통부는 신축 공동주택에 전기차 충전기 설치 의무 비율을 단계적으로 높이는 정책을 추진해왔다. 일정 규모 이상의 신축 아파트는 전체 주차대수의 일정 비율 이상을 충전 가능 구역으로 확보해야 한다. 기존 아파트 역시 전기차 보급 확대에 맞춰 충전기 설치 요구가 늘면서 관리규약 개정과 입주민 동의 절차를 거쳐야 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환경부에 따르면 전국 전기차 등록 대수는 꾸준히 늘고 있으며, 이에 비례해 공동주택 충전 인프라 설치 신청 건수도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문제는 신축과 달리 기존 아파트에서는 설치 공간과 전기 용량, 비용 부담 주체를 둘러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다는 점이다. 전기차 충전기는 완속과 급속으로 나뉘는데, 급속충전기는 설치비와 전기요금이 훨씬 높아 입주민 간 형평성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일부 단지는 전기차 보유 가구에만 별도 전기요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타협했지만, 실제 사용량을 정확히 계측하는 문제로 또 다른 분쟁이 생기기도 한다. 특히 완속충전기라 해도 수십 대가 동시에 설치되면 아파트 전체 수전 용량을 넘어설 수 있어, 변압기 증설 공사가 불가피한 경우가 적지 않다. 이 경우 공사비가 수천만 원에서 억대까지 불어나면서 비전기차 가구의 반발이 더욱 거세지는 구조다.
화재 안전에 대한 우려도 갈등의 핵심 축이다. 최근 몇 년 새 지하주차장에서 발생한 전기차 화재 사고가 알려지면서 충전시설이 밀집한 지하 공간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다. 비전기차 가구들은 화재 발생 시 진화가 어렵고 대피 경로가 제한되는 지하주차장 특성상 충전 구역을 지상이나 별도 공간으로 분리해달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전기차 보유 가구는 지상 주차장이 협소한 상황에서 현실적인 대안이 되기 어렵다고 반박한다. 일부 단지에서는 절충안으로 지하 1층 출입구와 가까운 구역에만 충전기를 배치하고, 주변에 방화벽과 자동소화설비를 추가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소방당국 관계자는 "전기차 화재는 일반 차량 화재보다 진압이 까다롭고 재발화 가능성이 있어 초기 대응 체계가 중요하다"며 "스프링클러 성능 기준과 질식소화포 비치 등 보완 조치가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충전시설 자체가 화재 위험을 직접적으로 높인다는 근거는 제한적이다"라고 덧붙였다. 소방 관련 학회 관계자 역시 "충전 중 과열이나 배터리 결함으로 인한 화재는 충전시설 유무와 무관하게 발생할 수 있다"며 "불안감이 과도하게 확산되는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공동주택 관리 전문가들은 관리규약 개정 과정에서 입주민 간 소통 부족이 갈등을 키운다고 지적한다. 한 주택관리사는 "충전시설 설치는 전체 입주민 동의 비율을 충족해야 하는데, 설명회나 공청회 없이 서면 동의만 받다 보니 반발이 커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비용 분담 방식과 안전 대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으면 합의에 도달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전기차 보유 가구와 비보유 가구가 참여하는 별도 협의체를 꾸려 비용 분담 비율을 단계적으로 조정한 단지일수록 갈등이 오래가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실제 입주민들의 체감 갈등은 작지 않다. 서울 강동구의 한 아파트에 거주하는 박모 씨(42)는 전기차 구매를 고려하다가 단지 내 충전기 설치가 지연되면서 계획을 미뤘다고 전했다. 그는 "관리비에 충전기 설치 비용이 포함될지, 전기차 가구만 부담할지 결론이 나지 않아 몇 달째 논의만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반대로 경기 수원의 한 단지에 사는 이모 씨(55)는 비전기차 가구 입장에서 충전시설 확충에 따른 전기 용량 증설 공사비가 전체 관리비 인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는 "전기차를 타지 않는 가구도 공사비를 나눠 내야 하는 구조가 불공평하게 느껴진다"고 밝혔다. 두 사람 모두 관리규약 개정안이 통과되기까지 적어도 반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사례로 인천의 한 아파트에 사는 정모 씨(38)는 충전 구역 배정 방식을 두고 입주민 간 다툼을 겪었다고 밝혔다. 그는 "먼저 신청한 순서대로 자리를 배정했는데, 밤늦게 퇴근하는 맞벌이 가구들이 자리를 못 잡아 민원이 폭주했다"며 "결국 추첨제로 바꿨지만 이번엔 형평성 시비가 또 불거졌다"고 말했다. 이처럼 설치 이후에도 운영 방식을 둘러싼 갈등이 반복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게 관리 현장의 공통된 설명이다.
지방자치단체 건축 인허가 부서 관계자는 "신축 아파트는 설계 단계부터 충전 인프라를 반영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갈등이 적지만, 기존 아파트는 전기 용량 확충 공사와 주차 구획 변경이 수반돼 공사비 산정과 책임 소재를 둘러싼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전기차 보급이 늘어날수록 기존 단지의 충전 인프라 확충 요구는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덧붙였다. 이어 "지자체 차원에서 공용 전기요금 분담 가이드라인이나 표준 관리규약 예시를 마련해 배포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고 전했다.
업계에서는 충전기 설치와 운영을 전문 사업자에게 위탁하는 방식이 늘고 있다고 설명한다. 사업자가 초기 설치비를 부담하고 충전 요금 수익으로 운영비를 회수하는 구조여서 입주민의 직접 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 경우에도 충전 구역 배정, 독점 계약 기간, 요금 수준을 둘러싼 입주민 간 이견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충전 사업자 관계자는 "입주민대표회의와 10년 안팎의 장기 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은데, 계약 기간 중 요금 인상이나 서비스 품질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면 중도 해지를 둘러싼 법적 분쟁으로 번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전기차 보급이 늘어나는 흐름 속에서 공동주택 충전시설을 둘러싼 논의는 각 단지의 입주자대표회의와 관리규약 개정 절차를 통해 개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설치 비용 분담 방식과 화재 안전 대책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관리규약을 마련한 단지와 그렇지 못한 단지 간 입주민 만족도 차이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일부 단지에서는 관리규약에 충전 구역 비율과 요금 체계, 안전 점검 주기를 명문화한 뒤부터 민원 건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는 사례도 확인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