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연합(EU)의 2028∼2034년 장기예산안을 둘러싸고 독일을 중심으로 한 6개국과 프랑스가 맞서면서 연내 타결 전망이 불투명해졌다. EU 집행위원회가 제안한 7년 예산은 약 2조유로로, 2021∼2027년 예산보다 약 60% 늘어난 규모다. 순기여국인 독일 등은 예산을 수천억유로 줄이고 지출 우선순위를 다시 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프랑스는 국방력 강화와 경제 경쟁력 확보를 위해 충분한 재정 투자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남부·중부·동부 유럽 17개국은 농업과 지역개발 지원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아일랜드가 집행위안보다 낮은 수정안을 제시했지만, 15∼16일 브뤼셀에서 열리는 정상회의를 앞두고 회원국 간 이견은 이어지고 있다.
약 2조유로 예산안, 기존보다 60% 늘어
집행위원회가 제안한 차기 장기예산은 2028년부터 2034년까지 7년간 적용되는 다년도 재정계획이다. 원문에 따르면 전체 규모는 약 2조유로, 원화로 약 3천11조원이다. 2021∼2027년 장기예산 약 1조2천억유로와 비교하면 약 60% 증가했다. 집행위는 방위와 기술, 에너지 등 새로운 분야에 투자할 재원을 예산에 담았다. 지난 8월 관련 보도에서는 물가상승분을 반영한 규모가 거의 2조유로이며, 2025년 불변가격 기준으로는 약 1조7천600억유로로 제시됐다. 집행위 안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며, 최종 확정에는 27개 회원국의 만장일치와 유럽의회 동의가 필요하다.
| 항목 | 규모 |
|---|---|
| 2028∼2034년 집행위 예산안 | 약 2조유로 |
| 2021∼2027년 장기예산 | 약 1조2천억유로 |
| 아일랜드 수정안의 집행위안 대비 감액 | 약 8% |
| 수정안과 집행위안 차이, 실질가치 | 1천600억유로 |
| 수정안과 집행위안 차이, 명목가치 | 1천410억유로 |
| 수정안과 기존 예산의 차이 | 30% 이상 |
지난 8월 보도에 따르면 집행위는 유럽경쟁력기금과 연구·혁신 지원사업인 ‘호라이즌 유럽’을 합쳐 4천500억유로 이상을 투입하겠다는 구상도 제시했다. 연구개발 결과가 시제품 제작과 사업화를 거쳐 생산으로 이어지도록 지원하고, EU 자체 산업 기반을 키우는 내용이다. 당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차기 예산이 유럽의 자립을 뒷받침하는 재정 수단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방위·기술·에너지에 더 투자하자는 데는 회원국들이 대체로 동의하지만, 그 재원을 기존 농업·지역개발 예산에서 마련할지를 놓고는 의견이 갈린다.
독일 등 6개국은 삭감, 프랑스는 투자 확대
역내 최대 경제국인 독일은 오스트리아, 덴마크, 핀란드, 네덜란드, 스웨덴과 함께 차기 예산안에서 수천억유로를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 6개국은 EU 예산에 내는 돈이 지원받는 금액보다 많은 순기여국이다. 각국이 재정 건전화를 위해 긴축하는 상황에서 EU 예산만 대폭 늘리는 것은 부담스럽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최근 EU에 보낸 서한에서 회원국과 마찬가지로 EU 예산도 지출 우선순위를 조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국방·안보, 경제 경쟁력, 이민 대응 등 핵심 분야에 재원을 집중하되 전체 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난 8월 보도에서는 독일의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도 집행위 예산안이 현행 장기예산보다 최대 60% 늘어나는 것으로 계산된다며 모든 분야가 삭감 대상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보도에 따르면 메르츠 총리는 공개 발언에서 구체적인 산정 기준을 설명하지 않았다. 방위와 기술 투자를 늘리려면 기존 지출 가운데 어느 분야를 줄일지를 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예산안 협상에서는 새로운 정책에 쓸 돈의 규모뿐 아니라, 지출을 줄일 분야와 회원국별 부담을 함께 논의하게 된다.
프랑스는 반대편에서 충분한 재정 투자를 요구하고 있다. EU 2위 경제국이자 순기여국인 프랑스는 유럽이 안보와 경제의 도전에 대응하려면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달 “우리는 야심 찬 유럽 예산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국방 등 EU 핵심 과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훨씬 더 강력한 유럽 예산을 지켜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프랑스도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다. 유력 대선 후보인 극우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 의원은 국가채무를 줄이기 위해 프랑스의 EU 예산 분담금을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농업·지역개발 지원 놓고 회원국 요구 엇갈려
예산 협상에는 순기여국 6개국과 프랑스 외에도 농업·지역개발 지원을 지키려는 회원국들이 참여하고 있다. 남부·중부·동부 유럽 17개국은 ‘결속 정책 우호국’ 연합체를 구성해 농업과 지역개발 지원금 확대를 요구한다. 지난 8월 보도에서도 체코와 슬로바키아, 리투아니아는 방위·기술 투자를 늘리더라도 농업과 지역개발 예산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뒤처진 지역의 기반시설과 일자리를 지원하는 예산, 농가를 지원하는 공동농업정책(CAP) 예산의 축소에 반대해 왔다.
체코의 안드레이 바비시 총리와 슬로바키아의 로베르트 피초 총리는 방위·기술 분야 투자를 늘리는 것과 농업·지역개발 예산을 줄이지 않는 것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투아니아의 기타나스 나우세다 대통령도 같은 입장을 내면서 방위와 군사 이동망, 핵심 기반시설에 더 많은 재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예산을 오히려 늘려야 한다는 국가들을 이끌고 있다고 지난 8월 보도됐다. 회원국마다 증액을 요구하는 분야와 삭감에 반대하는 항목이 달라, 집행위가 제시한 예산을 어느 항목에서 조정할지 합의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재원 마련 방식도 협상 쟁점이다. 집행위원회는 대기업 과세와 전자폐기물 부담금, 담배 관련 세금 인상 등을 제안했다. 유럽의회는 거대 디지털 기업과 온라인 도박에 대한 과세도 요구하고 있다. 새 세입원을 확보하면 회원국의 분담 부담을 줄일 수 있지만, 일부 회원국은 새로운 세금 도입에 반대하고 있다. 따라서 예산 총액 조정과 함께 세금을 새로 걷을지, 회원국 분담금을 어떤 방식으로 정할지도 논의 대상이다. 집행위 예산안이 확정되려면 회원국 27곳이 만장일치로 동의하고 유럽의회도 승인해야 한다.
아일랜드 수정안 제시…정상회의서 협상
EU 순회의장국인 아일랜드는 10일 회원국 간 이견을 좁히기 위한 수정 예산안을 제시했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수정안은 집행위원회가 제안한 규모보다 약 8% 낮다. 차이는 실질가치 기준 1천600억유로, 명목가치 기준 1천410억유로다. 다만 수정안도 2021∼2027년 장기예산보다 30% 이상 많다. 토머스 번 아일랜드 유럽 담당 장관은 “모든 회원국의 견해를 경청했고 그들의 최우선 순위를 파악하고자 협력했다”며 “원하는 걸 다 얻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EU는 올해 크리스마스까지 합의를 도출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법정 시한은 2027년 말이지만, 그보다 1년 앞서 합의를 추진하고 있다. 내년 프랑스 등에서 유럽통합에 회의적인 세력이 선거에서 승리하면 협상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가 배경이다. 스페인이 다음 달 조기 총선을 실시하기로 한 것도 정치적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회원국을 돌며 타협점을 찾고 있는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의 협의도 이어지고 있다.
오는 15∼16일 브뤼셀에서 열리는 EU 정상회의에서는 예산 규모와 분야별 지출, 새 세입원 등을 놓고 협상이 진행될 전망이다. 연내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논의가 내년으로 넘어갈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최종안은 회원국 만장일치와 유럽의회 동의를 거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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