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나물 줄이고 과일·송편 중심 상차림 확산

김모 씨(38)는 올해 추석 연휴를 앞두고 예년보다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장을 봤다. 전 부칠 재료 대신 과일과 송편, 나물 두어 가지만 준비하기로 가족과 미리 이야기를 마쳤기 때문이다. 김 씨는 "시댁 어른들이 먼저 간소하게 하자고 말씀하셔서 부담이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에는 명절 사흘 전부터 장을 봐서 이틀 내내 부엌에 있었는데, 올해는 반나절 만에 준비를 끝냈다"고 덧붙였다.
추석을 앞두고 차례상을 간소화하거나 아예 다른 형태로 대체하는 가정이 늘고 있다. 성균관 등 유교 관련 단체가 최근 몇 년간 발표해온 표준 차례상 제안이 대표적이다. 송편과 나물, 구이, 과일 등 기본 음식 몇 가지만으로도 차례를 지낼 수 있다는 내용이 알려지면서 실제로 상차림을 줄이는 가정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게 관련 단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성균관 측은 애초 차례상에 전을 부칠 필요가 없고, 홍동백서나 조율이시 같은 격식도 예법에 명시된 것이 아니라고 밝힌 바 있다.
통계청이 발표하는 명절 관련 인식 조사에서도 차례상을 간소화해야 한다는 응답이 매년 늘어나는 추세로 나타난다. 명절 음식 준비에 대한 부담이 여전히 특정 가족 구성원에게 쏠려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면서, 상차림을 최소화하거나 형식을 바꾸는 방식으로 이를 해소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내놓은 조사에서도 명절 가사노동 시간이 여전히 여성에게 편중돼 있다는 결과가 반복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간소화의 형태도 다양해지고 있다. 전통적인 열 가지 이상의 음식을 다 갖추는 대신 과일과 송편, 전 한두 가지만 올리는 이른바 '미니 차례상'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더해 아예 상차림 없이 가족이 모여 성묘만 다녀오거나, 간단한 다과와 함께 인사만 나누는 방식으로 명절을 보내는 가정도 늘었다. 일부 가정은 차례 대신 고인의 사진 앞에서 짧게 묵념하는 것으로 예를 대신하기도 한다.
일부 가정에서는 완제품 전이나 나물을 구매해 상에 올리는 방식으로 준비 시간을 줄이기도 한다. 대형마트와 온라인몰에서 명절 음식 완제품 판매량이 매년 증가하는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유통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직접 조리하는 대신 구매한 음식으로 상을 채우면서 시간과 노동 부담을 함께 줄이는 셈이다. 실제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명절 전 일주일 사이 전류와 나물류 완제품 매출이 지난해보다 두 자릿수 늘었다"고 전했다.
가족 형태 변화도 차례상 간소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인 가구와 소가족이 늘면서 대규모 상차림을 준비할 인력 자체가 줄어든 데다, 명절에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기 어려운 경우도 많아졌다는 것이다. 통계청 인구총조사에 따르면 1인 가구 비중은 이미 전체 가구의 3분의 1을 넘어섰고, 형제자매 수가 줄어든 세대가 부모 세대에 접어들면서 차례를 함께 모실 인원 자체도 자연히 감소하고 있다. 한 가족학 연구위원은 "명절 의례가 가족 구성원 전체의 참여를 전제로 만들어진 것인데, 참여 인원이 줄면 상차림의 규모와 형식도 자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세대 간 인식 차이도 뚜렷하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차례는 형식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부모 세대와 협의를 통해 상차림을 줄이는 사례가 늘고 있다. 반면 여전히 전통 방식을 고수하려는 가정도 있어, 세대 간 조율 과정에서 갈등을 겪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게 가족 상담 전문가들의 전언이다. 특히 맏며느리나 종갓집처럼 오랜 시간 전통 상차림을 이어온 가정일수록 간소화 논의 자체를 꺼내기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도 있다.
한 노무사는 명절 앞뒤로 진행되는 상담에서 가사노동 분담과 관련한 문의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명절 노동이 특정 성별이나 며느리에게 집중되는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지면서, 상차림을 줄이는 것이 갈등을 줄이는 실질적인 해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명절 직후 부부간 다툼이나 이혼 상담이 늘어나는 것도 이런 노동 불균형과 무관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종교나 개인 신념에 따라 아예 차례를 지내지 않는 가정도 늘고 있다. 박모 씨(45)는 몇 년 전부터 차례 대신 가족 여행이나 외식으로 명절을 대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부모님 세대에서도 차례를 강요하지 않으셔서 자연스럽게 형식이 바뀌었다"며 "중요한 건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는 데 모두 동의했다"고 전했다. 이모 씨(52)도 "종교적인 이유로 차례 대신 가족 예배를 드린 지 오래됐다"며 "형식은 다르지만 조상을 기리는 마음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통문화 연구자들은 차례 문화 자체가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해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한 민속학 연구위원은 "차례상의 형식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시대와 가족 상황에 맞춰 변형되어 온 역사를 갖고 있다"며 "최근의 간소화 흐름도 이런 변화의 연장선에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 후기 문헌에도 지역과 가문에 따라 차례 음식의 가짓수와 종류가 크게 달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간소화 과정에서도 세대 간 충분한 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 가족상담 전문가는 "형식을 바꾸는 것 자체보다, 그 과정에서 가족 구성원 모두의 의견이 반영됐는지가 더 중요하다"며 "일방적으로 결정하기보다는 사전에 충분히 협의하는 것이 갈등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또 "차례상 형식을 바꾸기 전에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미리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불필요한 갈등을 상당 부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올해 추석에도 완전한 전통 방식을 유지하는 가정과 간소화한 방식을 택하는 가정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명절 상차림의 형태는 가족마다 제각각이지만, 준비 과정에서 가족 구성원 간 대화를 거쳐 형식을 정한 경우가 많다는 공통점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