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별 인식은 바뀌었지만 실제 분담은 제자리걸음

추석 연휴가 끝나갈 무렵이면 어김없이 병원을 찾는 이들이 있다. 손목과 어깨 통증을 호소하며 진료실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대부분 40~50대 여성이다. 명절 연휴 직후 정형외과와 한의원을 찾는 발길이 늘어나는 현상은 이제 계절성 풍경처럼 자리 잡았다. 이른바 '명절증후군'이라 불리는 이 증상은 단순한 몸살이 아니라 명절 노동 구조가 오랫동안 특정 성별에 집중돼 왔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여성가족부가 실시해온 가족실태조사에 따르면 명절 음식 준비와 상차림, 설거지 등 가사노동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절반을 크게 웃돈다. 통계청의 생활시간조사 역시 명절 전후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평소보다 뚜렷하게 늘어나는 반면 남성의 증가폭은 상대적으로 작다는 결과를 보여준다. 명절이 다가올수록 여성의 노동시간과 남성의 노동시간 사이 격차가 벌어지는 구조가 수치로 드러나는 셈이다.
연휴 기간 하루 평균 가사노동 시간을 살펴보면 여성은 평소 대비 두 배 가까이 늘어나는 반면 남성의 증가폭은 그에 크게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명절 전날 장보기와 음식 준비, 명절 당일 상차림과 설거지, 이후 뒷정리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여성이 주도적 역할을 맡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조사 결과가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관계자는 이런 격차가 연령대와 무관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한다.
인식 자체는 확실히 달라졌다. 20~30대를 중심으로 진행된 여러 사회조사에서 '가사노동은 성별과 무관하게 함께 해야 한다'는 응답 비율이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는 결과가 나온다. 명절 상차림을 간소화하거나 외식으로 대체하는 가정도 늘었고, 차례를 지내지 않거나 형식을 축소하는 사례도 확산되는 추세다. 젊은 부부 세대는 명절 노동을 부부가 함께 분담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크지 않다는 반응을 보인다.
일부 지역 커뮤니티와 온라인 카페에서는 명절 상차림을 '반반 부담' 또는 '각자 시댁·처가에서 반나절씩'이라는 방식으로 재구성하려는 움직임도 관찰된다. 명절을 아예 여행지에서 보내거나 양가 부모를 함께 초대해 외식으로 대체하는 가정도 늘고 있다는 게 관련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주로 수도권 젊은 세대에 국한돼 있고, 지방이나 대가족 구조가 남아 있는 가정에서는 여전히 전통적 방식이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문제는 인식과 실제 행동 사이의 간극이다. 결혼 8년 차인 김모 씨(37)는 "시댁에 가면 남편은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저는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들어가게 된다"며 "말로는 평등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명절 당일이 되면 예전 방식 그대로 흘러간다"고 말했다. 그는 명절 전날부터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미 피로가 누적된 상태로 연휴를 맞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명절이 끝나면 며칠 동안 몸살을 앓는 게 당연한 일처럼 느껴진다"며 "이런 패턴이 매년 반복되면서 명절 자체가 부담스러워졌다"고 토로했다.
이런 현상은 개인의 의지 문제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사회학 연구위원은 "명절 노동 분담은 부부 개인의 가치관보다 대가족 관계망 안에서 형성된 관습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며 "며느리와 딸에게 기대되는 역할이 여전히 다르게 설정돼 있어 젊은 세대의 평등 의식이 시댁이라는 공간에 들어서면 힘을 잃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명절 노동 분담 갈등이 개인 간 갈등이 아니라 세대와 세대 사이에 놓인 구조적 문제로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부모 세대가 자란 환경에서는 명절 노동이 며느리의 역할로 당연시됐던 만큼, 이를 바꾸려면 부부 두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남성들의 입장도 단순하지 않다. 결혼 5년 차인 이모 씨(34)는 "어머니 앞에서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서면 오히려 아내가 불편해하는 상황이 생긴다"며 "며느리 입장에서는 시어머니 눈치를 보게 되고, 아들 입장에서는 부모님 눈치를 보게 되는 이중 구조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부부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양가 부모 세대의 기대치까지 함께 조율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전했다. 그는 "돕고 싶어도 부엌에 들어가면 오히려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경우가 많아 결국 거실에 머무르게 된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명절 노동 분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가족 구성원 간 사전 대화가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한 가족상담 전문가는 "명절 당일이 아니라 명절 전에 미리 역할을 정하고 이를 부모 세대에게도 설명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며 "갑자기 당일에 역할을 바꾸려 하면 갈등만 커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또 "차례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거나 배달 음식을 일부 활용하는 방식으로 노동 총량 자체를 줄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그는 "부부가 명절 전에 각자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정하고, 이를 시댁과 처가 양쪽에 미리 알리는 것만으로도 갈등이 크게 줄어드는 사례를 많이 봤다"고 말했다.
지방자치단체와 여성단체를 중심으로는 명절 성평등 문화 확산을 위한 캠페인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진행한 관련 조사에서는 명절 가사노동 분담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확대될수록 실제 가정 내 분담률도 점진적으로 개선되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분석이 제시된 바 있다. 다만 조사 대상과 지역에 따라 편차가 크다는 점도 함께 언급됐다. 일부 지자체는 명절 연휴 기간 성평등 가사분담을 주제로 한 홍보물을 제작해 배포하거나, 차례 간소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명절증후군을 호소하는 이들 중에는 신체적 통증뿐 아니라 심리적 피로를 함께 겪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명절 연휴 직후 우울감이나 무기력감을 호소하는 환자가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며 "가사노동 불균형이 반복되면 단순한 피로를 넘어 정서적 소진으로 이어질 수 있어 가족 내 대화와 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증상이 지속될 경우 전문가와 상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그는 이어 "명절 전후로 병원을 찾는 환자 중에는 신체 증상보다 가족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경우가 더 많다"며 "가사노동 문제가 단순한 집안일이 아니라 관계의 문제로 이어진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올해 추석 연휴에도 전국 각지의 가정에서는 상차림 준비를 둘러싼 크고 작은 신경전이 벌어졌다. 일부 가정은 남녀 구분 없이 요리와 설거지를 나눠 맡았고, 일부 가정은 예년과 다름없는 방식으로 명절을 치렀다. 명절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 속도와 폭은 가정마다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