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정·식각 장비는 자립 속도... 노광·EDA는 여전히 격차

경기 남부의 한 반도체 장비 제조 공장에서는 최근 세정 장비 신제품 출하를 앞두고 막바지 성능 검증이 한창이다. 이 회사가 만드는 습식 세정 장비는 국내 주요 반도체 제조사 라인에 이미 여러 대 공급된 상태로, 해외 장비 대비 가격 경쟁력과 대응 속도를 앞세워 점유율을 넓히고 있다. 국내 반도체 산업이 오랫동안 숙제로 안고 있던 소재·부품·장비, 이른바 소부장 국산화가 최근 몇 년 사이 눈에 띄게 진전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국내 반도체 장비 국산화율은 최근 30%대 초반까지 올라온 것으로 파악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20%대 초반에 머물던 수치다. 세정, 식각, 이송 장비 등 상대적으로 진입 장벽이 낮은 공정 분야에서 국내 기업들이 빠르게 기술력을 축적하면서 전체 평균을 끌어올린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반도체 웨이퍼 표면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세정 장비와 회로 패턴을 새기는 식각 장비 분야에서는 국내 기업 제품이 해외 유수 기업과 견줄 만한 성능을 보인다는 평가가 업계 안팎에서 나온다.

후공정 분야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반도체를 절단하고 포장해 최종 제품으로 완성하는 후공정 장비 시장은 그동안 전공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아왔지만, 최근에는 검사·계측 장비를 중심으로 국내 기업의 진입이 활발해지고 있다. 웨이퍼 결함을 미세 단위로 잡아내는 검사 장비는 반도체 수율과 직결되는 만큼 그동안 해외 기업 의존도가 높았던 영역이다. 그러나 국내 중소·중견 장비업체들이 인공지능 기반 영상 분석 기술을 접목하면서 검사 정확도를 끌어올렸고, 이를 앞세워 국내외 고객사 확보에 나서고 있다.

소재 분야의 국산화 흐름도 뚜렷하다.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특수가스, 포토레지스트(빛에 반응해 회로 패턴을 형성하는 감광액), 웨이퍼용 화학소재 등에서 국내 기업의 공급 비중이 꾸준히 늘었다. 특히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를 계기로 국내 대기업들이 국산 소재 채택을 적극 확대하면서, 과거 해외 의존도가 90%를 웃돌던 일부 품목은 국내 대체 공급망이 상당 부분 구축됐다는 평가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 관계자는 "정부와 기업이 함께 투자한 소재 국산화 프로젝트들이 실제 양산 라인에 적용되면서 성과가 가시화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불화수소, 극자외선용 포토레지스트, 불화 폴리이미드 등 이른바 3대 수출규제 품목으로 불렸던 소재들도 상황이 달라졌다. 이들 품목은 규제 이후 국내 기업들이 앞다퉈 국산화 투자에 나서면서 일부는 이미 안정적인 양산 공급 단계에 진입했다는 게 관련 업계의 설명이다. 다만 최첨단 미세공정에 쓰이는 초고순도 등급의 소재는 여전히 해외 기업의 기술력에 의존하는 부분이 남아 있어, 품목별 국산화 수준이 균일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국산화율 상승세를 곧 기술 격차 해소로 보기는 이르다는 지적도 함께 나온다. 반도체 제조 공정의 핵심 중 핵심으로 꼽히는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는 여전히 특정 해외 기업의 독점 체제가 굳건하다. 노광 장비는 회로 패턴을 웨이퍼에 새기는 공정에 쓰이는 장비로, 최첨단 미세공정으로 갈수록 그 중요성이 커진다. 이 분야는 기술 난도가 워낙 높아 국내 기업이 단기간에 진입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꼽힌다.

반도체 설계 자동화 소프트웨어인 EDA(전자설계자동화) 툴 역시 해외 기업 의존도가 절대적이다. 반도체 회로를 설계하고 검증하는 데 필수적인 이 소프트웨어는 특정 해외 기업 몇 곳이 시장을 사실상 과점하고 있어, 국내 팹리스(설계 전문) 기업들도 대체재를 찾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화학소재 중에서도 초고순도가 요구되는 일부 특수가스와 첨단 포토레지스트는 여전히 해외 기업의 기술력에 크게 의존한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설명이다.

반도체 공정기술 연구위원은 "국산화율이라는 숫자만 놓고 보면 상당한 진전이 있었지만, 공정별로 뜯어보면 편차가 크다"며 "세정·이송처럼 표준화된 장비에서는 국내 기업이 경쟁력을 확보했지만 노광이나 초정밀 계측 장비처럼 오랜 시간 축적된 노하우가 필요한 분야는 여전히 진입장벽이 높다"고 말했다. 이어 "국산화는 단순히 대체품을 만드는 것을 넘어 실제 양산 라인에서 검증받고 신뢰를 쌓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라고 덧붙였다.

현장의 체감도 이와 비슷하다. 반도체 장비업체에서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김모 씨(41)는 "국내 대기업 라인에 시범 적용까지 가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 이후 안정적인 수율을 입증해야 실제 발주로 이어진다"며 "해외 장비 대비 실적이 짧다 보니 신뢰를 얻기까지 시간이 더 걸린다"고 전했다. 그는 "최근에는 국내 반도체 제조사들이 공급망 다변화 차원에서 국산 장비 테스트 기회를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열어주는 분위기"라고 덧붙였다.

소재 분야에서 일하는 박모 씨(37)도 비슷한 경험을 전했다. 그는 "국산 소재로 전환하려면 기존 공정 조건을 세밀하게 재조정해야 해서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든다"며 "그럼에도 고객사에서 공급망 다변화 요청이 늘면서 국산 소재 테스트 물량 자체는 확실히 늘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품질 편차를 줄이는 게 관건인데, 최근에는 로트별 편차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추세"라고 덧붙였다.

정부는 소부장 국산화를 지원하기 위한 예산과 실증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반도체 특화단지 조성과 함께 국산 장비·소재의 실증 테스트베드 구축 사업을 병행하고 있으며,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을 통해 관련 연구개발 과제도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다만 업계에서는 단기 지원에 그치지 않고 장기간에 걸친 안정적 투자와 수요기업의 국산 장비 채택 확대가 병행돼야 실질적인 자립도가 높아질 것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와 함께 반도체 특화단지 내 국내 대기업과 중소 장비·소재 기업 간 협력 체계도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대기업이 시제품 단계에서부터 국내 협력사와 공동으로 성능을 검증하고, 문제점을 조기에 피드백하는 방식의 협업이 늘고 있다는 게 관련 기관의 설명이다. 이런 협력 구조는 국산 장비와 소재가 실제 양산 라인에 안착하는 기간을 단축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계 반도체 장비 시장은 몇몇 해외 기업이 주요 공정별로 과점하는 구조가 오랫동안 유지돼 왔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 통계를 보면 노광, 증착, 식각 등 핵심 공정 장비 시장에서 상위 소수 기업의 점유율이 여전히 압도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구조 속에서 국내 기업들이 세정, 이송, 후공정 검사 장비 등 상대적으로 접근 가능한 영역부터 점유율을 넓혀가고 있는 셈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소부장 국산화가 단순한 자립의 문제를 넘어 공급망 안정성과 직결된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 몇 년간 이어진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지정학적 긴장은 특정 국가나 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산업 구조의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냈다는 평가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국산화율 수치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위기 상황에서도 국내 생산 라인이 멈추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공급망 안전판을 갖추는 일"이라고 말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 통계에 따르면 국내 소부장 관련 기업 수와 매출 규모도 최근 몇 년간 꾸준히 늘어난 것으로 집계된다. 특히 중견·중소기업 비중이 높은 장비 분야에서 신규 기업의 시장 진입이 이어지면서 생태계 저변이 넓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만 일부 품목에 국산화가 집중되는 쏠림 현상도 함께 나타나고 있어, 균형 있는 기술 포트폴리오 구축이 과제로 남아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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