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국제형사재판소(ICC) 기관 자체를 제재 대상으로 지정하자 유럽 각국이 우려를 표명하고 대응 방안 논의에 나섰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ICC가 계속 운영되도록 협력하겠다고 밝혔고,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미국 제재가 유럽의 기업과 개인에게 적용되지 않도록 하는 EU 차단규정 발동을 요구했다. 미국은 ICC와 거래하는 기업·개인에 6개월 유예기간을 제시했으며, EU는 그 기간에 대화할 여지가 있다고 밝혔다. 미국 재무부가 ICC 관련 거래를 허가하는 면허를 발급하면서 제재의 적용 범위와 예외도 함께 제시한 가운데, ICC는 자체 업무를 이어갈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ICC 기관 전체로 넓어진 미국 제재
미 국무장관은 9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미국이 ICC에 제재를 부과한다고 발표했다. 미 국무부는 ICC가 제기하는 위협을 무력화하고 미국 주권을 지키기 위한 추가 조치라고 설명했다. 미국은 행정명령 14203호에 따라 ICC를 제재 대상으로 지정했다. 앞서 트럼프 행정부는 ICC 소속 법률가와 직원 등을 상대로 제재를 부과해왔으며, 이번에는 개별 관계자를 넘어 재판소 기관 자체를 대상으로 삼았다. 미국은 동맹국에도 제재에 협조할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미 재무부는 제재와 함께 ICC 관련 거래를 허가하는 일반면허를 발급했다. 미 국무부 자료에 따르면 면허에는 ICC 운영 유지를 포함해 180일 동안 허용되는 활동, 클라우드와 소프트웨어 서비스를 포함한 정보기술 관련 활동, ICC 연금제도 활동, 수감자 관련 활동이 담겼다. 면허와 예외가 적용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미국 안에 있거나 미국인의 소유·통제 아래 있는 ICC의 재산과 재산적 권익은 동결되며, 미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에 신고해야 한다. 기부와 자금·재화·용역 제공도 동결 대상에 포함된다. ICC와 거래하려는 기업은 미국 정부가 승인한 면허가 필요하다. 마르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우리는 불량 재판소와의 거래를 금지하고, 자원을 차단하며, 운영 능력을 마비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등 이스라엘 당국자에 대한 ICC 체포영장과, 재판소가 이후 종결한 과거 아프가니스탄 내 미군 행동 조사를 문제 삼아왔다. ICC는 2024년 네타냐후 총리와 요아브 갈란트 전 국방장관에 대해 가자지구 전쟁 수행 과정의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두 사람은 혐의를 부인했다. 미국은 로마규정에 서명했지만 비준하지 않아 ICC 회원국이 된 적이 없다. 미국의 ICC 관할권 반대는 로마규정 당사국이 아닌 국가의 국민에게도 재판소가 일정한 경우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문제와 연결돼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해 1월 출범 뒤 ICC 관계자들을 제재했고, 9일에는 재판소 전체를 대상으로 조치를 확대했다.
유럽 각국, 지지와 협상 가능성 함께 제시
EU 집행위원회는 9일 성명에서 “EU는 ICC가 계속 효과적으로 운영되도록 긴밀히 협력할 것”이라며 “로마규정 당사국 125개국 전부와 협력해 ICC의 독립을 지키고 존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집행위는 미국이 ICC와 거래하는 기업과 개인에 제시한 6개월 유예기간을 언급하며 대화의 여지가 있다고 했다. 제재가 발효되기 전 협상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ICC 본부가 있는 네덜란드의 롭 예턴 총리도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과 공동 기자회견에서 제재 발효까지 대화할 시간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덴마크·독일·프랑스·이탈리아·영국·캐나다·일본 외무장관은 공동 성명을 내고 ICC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했다. 이들은 “제재가 발동되면 재판소 업무와 헌신적 직원들, 그 가족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밝혔다. 성명에는 유럽 국가뿐 아니라 캐나다와 일본도 참여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지지 표명과 별도로 EU 차원의 대응을 촉구했다. 톰 베렌드선 네덜란드 외무장관은 미국 제재를 무력화하기 위해 차단규정 발동을 준비하도록 EU 집행위원회에 요청했다고 밝혔다. 막심 프레보 벨기에 외무장관도 ICC를 보호하기 위한 차단규정 발동을 요구하고, 다음 주 EU 외무장관 회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겠다고 말했다.
유럽 각국의 대응은 미국과의 대화 가능성을 언급하는 동시에 제재가 실제로 유럽 내 거래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할 방안도 검토하는 형태다. 집행위는 6개월 유예기간을 협상 여지로 제시했고,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차단규정 논의를 요구했다. 베렌드선 장관이 집행위에 발동 준비를 요청한 데 이어 프레보 장관은 외무장관 회의 의제로 삼겠다고 밝혔다. EU 집행위는 125개 로마규정 당사국과 협력하겠다고 했지만, 차단규정 발동 여부나 구체적인 실행 방식은 아직 결정됐다고 발표되지 않았다. 미국의 면허가 허용하는 활동과 제재 대상 거래가 함께 제시된 만큼, 유럽 측 논의에는 ICC의 운영을 지원할 방법과 미국의 조치가 역내 기업에 적용되는 문제 등이 포함돼 있다.
차단규정 발동 요구는 지난달부터 이어져
EU 차단규정은 제3국이 부과한 제재를 EU 역내 기업과 개인이 따르지 않도록 하는 조치다. 원래 미국의 쿠바·이란 제재로 유럽 기업이 불이익을 받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규정이 발동되면 유럽의 기업과 은행이 미국 제재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네덜란드 외무장관은 이 규정의 발동 준비를 집행위에 요청했고, 벨기에 외무장관도 발동을 요구했다. 다만 규정을 ICC 사안에 실제 적용할지는 EU 차원의 논의와 결정이 필요한 상태다.
당시 네덜란드의 더르크 호팅크 유럽의회 의원은 ICC와 직원들을 보호해야 한다며 EU 집행위에 발동을 촉구했다. 호팅크 의원은 “미국 행정부는 명확한 신호가 있을 때만 움직인다”며 집행위의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제재를 자동 적용하는 관행이 과거 미국을 우방으로 여기던 시절에서 비롯됐다며, 미국을 자동으로 따르는 일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출신 니콜라 기요 ICC 재판관은 유럽의회 경제위원회 청문회에서 ICC 관계자들이 알카에다와 이슬람국가(IS) 조직원, 부패 정치인, 국제 마약 밀매업자들과 같은 명단에 올라 있다고 지적했다.
두 장관은 방문 뒤 공동 기자회견을 했고, 베렌드선 장관은 차단규정을 “핵 옵션”이라고 표현하며 중요성을 강조했다. 독일은 그동안 이스라엘을 지지해왔으며, 독일 외무장관이 ICC를 방문한 사실도 당시 보도됐다. 유럽의회 의원과 ICC 재판관의 문제 제기, 두 나라 외무장관의 방문에 이어 네덜란드와 벨기에 정부가 집행위와 EU 외무장관 회의에 차단규정 논의를 요구한 것이다. EU 차단규정은 미국 제재가 유럽 기업과 개인에 미치는 영향을 차단하는 제도지만, 이번 ICC 사안에서 발동될 경우 어떤 절차와 범위로 적용할지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ICC, 금융·IT 의존 줄이는 대응 준비
ICC는 미국의 제재가 재판소의 임무 수행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지난 8월 미국 제재 명단에 오른 아카네 도모코 ICC 소장은 9일 영상 성명에서 “오늘 미국이 역사상 전례 없는 조치로 ICC 기관 자체를 제재했다”며 “재판소의 임무 수행을 방해하려는 시도는 용납할 수 없다. 재판소를 설립한 주권 국가들에 대한 공격”이라고 말했다. 이어 “재판소의 운명은 이제 설립한 국가들에 달려 있다”며 로마규정 당사국들에 제재를 무력화할 방법을 찾아달라고 호소했다. ICC 차장검사 나자 샤밈 칸도 제재에 대해 국제 법치주의와 독립 사법기관의 업무를 훼손하려는 의도라고 밝히고, 수사와 기소를 포함한 업무를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미국의 이전 제재 대상에 오른 ICC 관계자 상당수는 애플·아마존·페이팔 등 미국 기업의 이메일과 금융거래 계정이 이미 차단됐다. ICC는 추가 제재에 대비해 업무용 마이크로소프트 소프트웨어를 독일산 공공기관용 프로그램 오픈데스크로 바꾸고 있다. 금융거래 제재를 우회할 방안도 마련해두고 있다. 이번 제재는 기관 자체와 관련 거래를 대상으로 하며, 미 재무부가 발급한 면허에 따라 운영·정보기술·연금·수감자 관련 활동에는 예외가 제시됐다. 다만 예외를 벗어난 거래는 미국 내 재산 동결과 신고 의무의 적용을 받을 수 있다. ICC가 기존 관계자 제재 때 겪은 이메일·금융 계정 차단에 이어 기관 전체를 겨냥한 조치에 대비하고 있는 상황이다.
ICC는 2002년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 집단학살을 처벌하기 위해 설립됐으며, 로마규정 당사국은 125개국이다. 본부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다. 미국의 제재 발표 뒤 EU 집행위는 로마규정 당사국들과 협력해 ICC의 독립과 운영을 지키겠다고 밝혔고,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차단규정 논의를 요구했다. 다음 주 EU 외무장관 회의에서 차단규정 문제가 논의될 예정이다. 미국이 제시한 6개월 유예기간 동안 대화가 이어질지와 EU가 규정을 발동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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