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진단 통과 빨라졌지만 공사비 인상에 조합원 셈법 복잡

정부의 도심 주택 공급 확대 기조에 따라 재건축과 재개발 등 정비사업 문턱이 대폭 낮아진 가운데 현장의 사업 속도전과 비용 갈등이 교차하고 있다. 안전진단 규제 완화와 용적률 상향 인센티브가 본격적으로 적용되면서 정비구역 지정과 인허가 절차는 과거보다 눈에 띄게 빨라졌다. 반면 원자재 가격 상승과 인건비 인상이 맞물리며 치솟은 공사비가 조합원 추가 분담금 부담으로 직결되면서 사업 추진의 최대 변수로 떠올랐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정비사업 패스트트랙 제도 도입 이후 준공 30 년이 넘은 노후 단지들의 안전진단 통과 비율이 크게 늘어났다. 구조 안전성 가중치가 하향 조정되고 주거 환경 및 설비 노후도 평가 비중이 확대되면서 초기 단계 진입 장벽이 대폭 허물어진 결과다. 여기에 지자체별 정비계획 통합 심의가 확대 도입되면서 통상 4~5 년 이상 걸리던 구역 지정 및 인허가 기간이 절반 수준으로 단축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도시정비법 개정안 시행으로 역세권 및 고밀 복합개발 구역에 대한 법적 상한 용적률 완화 혜택도 본격화했다. 준주거지역이나 역세권 정비구역을 중심으로 최대 용적률을 적용받아 건립 세대수를 늘리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늘어난 용적률의 일정 비율을 공공임대주택이나 공공기여 시설로 기부채납하더라도 전체 일반분양 물량을 확대해 사업성을 개선하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그러나 현장의 셈법은 한층 복잡해졌다. 규제 완화로 행정 절차는 단축됐지만 사업성을 좌우하는 핵심 지표인 3.3 ㎡당 공사비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등했기 때문이다. 한국부동산원에 접수된 공사비 검증 신청 건수는 매년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으며 시공사와 조합 간 공사비 증액 갈등으로 공사가 일시 중단되거나 시공 계약이 해지되는 사업장도 속출하고 있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집계 결과 3.3 ㎡당 평균 공사비는 수도권 주요 정비구역을 기준으로 수년 전 500만 원대에서 최근 800만~1000만 원 선을 웃돌고 있다. 하이엔드 브랜드를 적용하거나 특화 설계를 도입하는 일부 서울 핵심 단지에서는 3.3 ㎡당 1100만 원을 넘어서는 입찰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건축 원자재 가격 상승세와 법정 안전 관리비 인상, 노동 시간 단축 및 숙련공 인건비 상승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공사비 인상은 고스란히 조합원 권리가액 대비 추가 분담금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종전에는 재건축이나 재개발을 추진할 때 기존 주택 평가액과 일반분양 수익을 통해 새 아파트를 분양받고도 환급금을 받거나 소액의 분담금만 납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일반분양가 상한선이 시장 수요에 부딪힌 상태에서 공사비가 급증하자 조합원들이 감당해야 할 분담금이 수억 원대로 치솟는 실정이다.
서울의 한 정비구역에서 조합원으로 참여 중인 정모 씨(61)는 10 년 넘게 기다려 마침내 사업시행인가를 눈앞에 두고 있지만 통보받은 예상 분담금 액수를 보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정 씨는 전용면적 84 ㎡ 새 아파트에 입주하려면 기존 자산 외에 4억 원이 넘는 분담금을 추가로 내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며 은퇴 후 고정 소득이 제한된 상황에서 감당하기 버거운 수준이라 매도를 고민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또 다른 수도권 재개발 구역의 조합원 박모 씨(53) 역시 조합 내부 갈등으로 인한 사업 지연을 우려하고 있다. 박 씨는 당초 계획보다 공사비가 30 % 이상 오르면서 비례율이 크게 떨어졌고 이에 반발한 비상대책위원회가 결성돼 조합 집행부 해임 총회를 추진하고 있다며 인허가가 빨라져도 내부 갈등으로 사업이 멈추면 금융 비용만 불어난다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정비사업 규제 완화가 사업의 진입로를 넓혀준 것은 분명하지만 실제 준공과 입주까지 이어지려면 조합의 자금 조달 구조와 비례율 관리가 핵심이라고 짚는다. 한 감정평가사는 용적률 인센티브를 최대로 받는다고 해서 무조건 사업성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며 기부채납 비율과 임대주택 건설 비용, 늘어난 공사비를 면밀하게 따져 실질적인 분양 수익이 추가 비용을 상쇄하는지 검증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 세무사는 관리처분계획 인가 단계에서 책정되는 비례율이 100 % 밑으로 떨어지면 조합원 권리가액이 축소돼 개인별 분담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며 은퇴 계층이 많은 노후 단지일수록 분담금 납부 능력이 떨어지는 조합원들이 사업 진행에 반대하면서 법적 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공사비 증액을 둘러싼 시공사와 조합 간 힘겨루기도 장기화하는 양상이다. 건설사들은 원자재 수입 물가와 현장 노무비가 급등한 상황에서 기존 도급 계약 금액으로는 적자 시공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반면 조합은 무리한 설계 변경 요구나 검증되지 않은 물가 상승분 반영을 수용할 수 없다며 맞서고 있다.
이러한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지자체와 공공기관의 공사비 사전 검증 제도가 운영되고 있지만 법적 강제성이 없어 완전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는 한계가 따른다. 국토교통부와 각 지방자치단체는 공사비 분쟁 정비구역에 전문 중재단을 파견하고 표준계약서 보급을 확대하는 등 분쟁 최소화 지원책을 병행하고 있다.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는 정비사업장에서는 시공사 선정 시기를 둘러싼 셈법도 치열하다. 서울시 등 일부 지자체가 조례 개정을 통해 시공사 선정 시기를 조합설립인가 직후로 앞당기면서 초기 자금 조달은 수월해졌지만 설계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계약을 체결해 추후 공사비 증액 갈등의 불씨를 키운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도시계획 연구위원은 시공사를 조기에 선정하면 사업 추진 자금을 빠르게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구체적인 공사 내역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계약이 이뤄져 사업시행인가 이후 공사비가 대폭 증액되는 분쟁이 빈번하다며 정비계획 수립 단계부터 공사비 변동 가능성을 보수적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리 변동성과 금융 비용 역시 정비사업장의 수익성을 압박하는 요인이다. 정비사업은 추진위원회 구성부터 이주 및 철거, 착공, 준공에 이르기까지 수천억 원에 달하는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과 사업비 대출에 의존한다. 고금리 기조가 이어질 경우 사업 기간이 수개월만 지연돼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금융 이자가 고스란히 조합원 분담금으로 전가된다.
이에 따라 최근 정비사업장에서는 기존의 무리한 고급화 전략이나 특화 설계를 지양하고 실속형 평면과 기본형 마감재를 선택해 공사비를 최대한 낮추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외관 특화나 고급 커뮤니티 시설 설치 계획을 축소하고 시공사와의 협상을 통해 마감재 등급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3.3 ㎡당 공사비를 일정 수준 이하로 방어하려는 전략이다.
동시에 단지 내 상가 소유주와의 갈등, 국공유지 매입 비용, 환경영향평가 및 교육환경평가 심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설계 변경 등 정비사업 곳곳에 도사린 복병들도 사업 기간과 비용을 늘리는 변수로 작용한다. 인허가 완화 정책으로 외형적 속도는 붙었으나 실제 사업의 성패는 정밀한 수지 계산과 조합원 간 이해관계 조율에 달려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와 지자체는 정비사업 초기 자금 지원과 융자 한도 확대를 통해 조합의 금융 부담을 덜어주는 방안을 운영 중이다. 정비사업을 추진하는 각 조합은 총회 의결 과정에서 공사 도급 계약서의 물가 변동 배제 특약 유무와 마감재 사양, 설계 변경 시 공사비 산출 기준 등을 세밀하게 검토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