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힐링극과 고자본 장르물로 갈린 2026 편성 경쟁

가을 개편과 함께 안방극장 주도권을 잡기 위한 방송사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플랫폼의 콘텐츠 경쟁이 본격화했다. 지상파 방송사는 전통적 시청층을 겨냥한 가족 휴먼 드라마와 정통 서사극을 전면에 배치했다. 반면 글로벌 및 토종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플랫폼은 대규모 제작비를 투입한 장르물과 범죄 스릴러로 맞불을 놓았다. 매체 환경 변화에 따라 시청자 유입 통로가 다변화되면서 플랫폼마다 차별화된 편성 전략을 가동하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방송영상 콘텐츠 산업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방송 영상 플랫폼 이용자의 하루 평균 콘텐츠 소비 시간은 2 시간 18 분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실시간 방송 시청 비중은 43 %를 기록했고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시청 비중은 57 %를 차지했다. 50대 이상 시청층에서는 여전히 고정형 텔레비전 수상기를 통한 본방송 시청 비율이 60 %를 웃돌았다. 20대와 30대에서는 80 % 이상이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프로그램을 소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시청층 양극화는 하반기 편성표에 그대로 반영됐다. 주요 지상파 방송사는 중장년층과 가족 단위 시청자를 묶어둘 수 있는 따뜻한 감성의 휴먼 드라마를 집중적으로 편성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갈등과 화해를 다룬 가족극과 지역 사회를 배경으로 한 힐링 드라마가 주말과 평일 프라임 시간대를 채웠다. 붕괴된 공동체 회복이나 세대 간 소통을 다룬 서사가 중심을 이루며 안정적인 시청률 확보를 꾀하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가 내놓은 방송매체 이용행태 조사에서도 60대 이상의 72.4 %가 지상파 텔레비전을 필수 매체로 꼽았다. 지상파 방송사들은 이 같은 고정 이용자의 충성도를 유지하기 위해 친숙한 일상극과 주말 연속극 편성을 강화하고 있다. 자극적인 반전이나 복잡한 세계관 대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가족 서사를 중심에 배치했다. 편안한 시청 환경을 선호하는 중장년층 가구를 안방극장으로 유인하려는 포석이다.
역사적 사실을 재해석한 대하 사극과 시대극도 지상파의 주요 무기로 다시 등장했다. 방대한 세트 제작과 다수의 보조출연자가 투입되는 정통 사극은 중장년 남성 시청층을 텔레비전 앞으로 끌어당기는 역할을 맡는다. 방송사들은 검증된 역사적 인물의 생애를 입체적으로 조명하며 중장년 고정 시청층을 흡수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익숙한 서사와 묵직한 연출력으로 실시간 시청률 반등을 노리는 계산이다.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팩션(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창작물) 드라마도 잇따라 전파를 탄다. 격동기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해 중장년층에게는 향수를, 젊은 세대에게는 신선한 역사적 경험을 전달한다는 구상이다. 의상과 소품 등 고증 작업에만 수십억 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역사 속 영웅 서사와 가족애를 엮어내며 폭넓은 세대 간 시청 장벽을 낮추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
문화평론가는 지상파 채널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매체 특성을 고려해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는 전략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자극적인 소재보다는 온 가족이 함께 시청할 수 있는 무해한 이야기 구조가 지상파의 경쟁력이라는 분석이다. 지나치게 파격적인 장르물은 주 시청층의 이탈을 부를 수 있어 안전한 선택을 내렸다고 평가했다. 검증된 서사 구조가 지상파의 실시간 시청 지표를 지키는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반면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플랫폼들은 수위 높은 장르물과 대작 시리즈로 구독자 수성에 나섰다. 하반기 공개를 앞둔 오리지널 드라마 라인업은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다룬 공상과학물과 연쇄 범죄를 추적하는 하드보일드 수사극이 주를 이룬다.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을 전면에 내세운 파격적인 액션과 심리 스릴러도 대거 포함됐다. 몰입감 높은 서사로 신규 유료 가입자를 유치하고 기존 이용자의 이탈을 막겠다는 구상이다.
글로벌 플랫폼을 필두로 한 신작들은 웹툰과 웹소설 등 검증된 지식재산권을 기반으로 제작됐다. 탄탄한 원작 팬덤을 보유한 다크 히어로물과 초자연적 현상을 다룬 미스터리 드라마가 잇따라 편성표에 이름을 올렸다. 플랫폼 이용자들의 능동적인 시청 행태를 고려해 매회 반전을 거듭하는 압축적 구성을 내세웠다. 짧은 호흡의 전개와 감각적인 영상미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시선을 사로잡겠다는 계산이다.
플랫폼 간 가입자 유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시리즈당 제작비 규모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의 매체 이용 행태 조사에 따르면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이용자가 한 플랫폼에 머무는 평균 구독 기간은 3.4 개월에 불과했다. 화제작이 완결되면 곧바로 구독을 해지하는 연쇄 이동 현상이 잦아진 탓이다. 플랫폼들은 완결 이후에도 구독을 유지하도록 만들기 위해 블록버스터급 오리지널 콘텐츠를 촘촘한 간격으로 공개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 진출을 염두에 둔 텐트폴(흥행을 이끌 대작) 작품의 경우 회당 제작비가 30 억 원을 웃도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컴퓨터 그래픽 특수효과와 해외 로케이션 촬영 비중이 늘면서 편당 총제작비가 300 억 원에서 500 억 원 규모로 불어났다. 대규모 자본을 바탕으로 한 시각적 완성도가 구독자 유입의 핵심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제작비 상승은 드라마 유통 구조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지상파와 종합편성채널은 단독 제작 부담을 덜기 위해 글로벌 플랫폼과의 동시 방영 계약을 확대했다. 회당 수십억 원에 달하는 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해 해외 사전 판권 판매를 필수로 진행하는 구조가 정착됐다. 순수 국내 광고 수익만으로는 대작 드라마의 손익분기점을 맞추기 어려워진 방송가의 현실이 반영된 결과다.
이에 따라 방송사들은 제작 초기 단계부터 글로벌 스트리밍 플랫폼과 공동 투자를 유치하거나 선판매 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지상파 본방송으로 송출하고 글로벌 전역에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실시간으로 공급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결합은 방송사에게는 안정적인 제작비 회수를, 플랫폼에게는 다양한 콘텐츠 수급 경로를 보장해 주는 협력 모델로 자리 잡았다.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는 플랫폼 다변화로 기획 단계부터 목표 시청층을 명확히 설정해야 생존할 수 있다고 밝혔다. 지상파 납품용 콘텐츠는 대중성과 심의 규정을 우선 고려하고 플랫폼 오리지널은 차별화된 콘셉트와 높은 완성도에 집중한다고 전했다. 제작비 조달 경로가 복잡해진 만큼 판권 배분과 방영권 협상이 과거보다 까다로워졌다고 덧붙였다.
콘텐츠 유통사 관계자는 글로벌 판권 시장의 경쟁이 격화되면서 단독 방영권뿐 아니라 2 차 부가 판권 계약의 중요성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방송 권역과 공개 시점을 분할해 수익을 다각화하지 않으면 제작비 회수가 불가능한 구조라는 분석이다. 해외 시장의 선호 장르와 국내 시청자의 정서적 요구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맞춤형 기획이 필수가 됐다고 짚었다.
시청자들의 미디어 소비 방식도 플랫폼 전략에 따라 뚜렷하게 나뉘고 있다. 직장인 김모 씨(35)는 퇴근 후 짧은 시간 동안 몰아볼 수 있는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장르물을 주로 시청한다고 말했다. 빠른 전개와 화려한 연출을 선호해 주말에 한 번에 여러 회차를 몰아보는 편이라고 밝혔다. 보고 싶은 작품이 끝나면 다른 플랫폼으로 구독을 전환하며 비용을 관리한다고 설명했다.
대학원생 이모 씨(28)는 평일 이동 시간이나 식사 시간에 모바일 기기를 이용해 오리지널 시리즈를 소비한다고 전했다.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40 분에서 50 분 분량의 콘텐츠를 1.2 배속이나 1.5 배속으로 빠르게 시청하는 방식이다. 정해진 방송 시간에 맞춰 수상기 앞에 앉는 방식은 시간 제약이 커 피하게 된다고 말했다.
반면 주부 박모 씨(51)는 저녁 식사 시간대 지상파 일일 드라마와 주말 연속극을 챙겨본다고 전했다. 가족들이 모여 편안하게 볼 수 있는 밝은 분위기의 드라마를 선호하며 복잡하고 잔혹한 장르물은 피하게 된다고 말했다. 텔레비전 본방송 시간에 맞춰 채널을 틀어놓는 것이 오랜 생활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고 덧붙였다.
자영업자 정모 씨(62) 역시 정규 뉴스 직후 이어지는 지상파 연속극을 꾸준히 시청하고 있다고 밝혔다. 복잡한 복선이나 빠른 화면 전환보다는 인물 간의 대화 중심으로 흘러가는 드라마가 이해하기 편하다고 설명했다. 별도의 가입 절차나 결제 없이 무료로 시청할 수 있다는 점도 고정형 텔레비전을 고수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플랫폼 간의 경쟁은 단순한 콘텐츠 대결을 넘어 공개 방식의 실험으로 이어지고 있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플랫폼들은 전 회차를 한 번에 공개하던 기존 방식을 벗어나 매주 1 회나 2 회씩 순차적으로 공개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용자의 구독 기간을 최소 4 주에서 8 주 이상 연장하려는 장치다. 실시간 방송의 방영 패턴을 디지털 플랫폼이 차용하는 역전 현상이 나타난 셈이다.
공개 일정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는 파트제(Part制) 도입도 보편화됐다. 총 12 부작 시리즈를 6 부작씩 한 달 간격으로 분할 공개해 화제성을 장기간 이어가려는 계산이다. 다음 회차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켜 커뮤니티 내 토론을 유도하고 가입자의 이탈을 방지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방송사 역시 모바일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짧은 분량의 요약 영상과 온라인 전용 미공개 장면을 적극적으로 유포하고 있다. 70 분짜리 본방송을 10 분 안팎의 핵심 클립으로 재가공해 동영상 공유 플랫폼에 공급하며 젊은 층의 본방송 유입을 유도한다. 본방송 시청률 지표 외에도 디지털 화제성 지수를 편성 유지와 광고 단가 산정의 핵심 지표로 활용하고 있다.
스마트폰 화면에 맞춘 세로형 쇼츠와 릴스 형태의 1 분 미만 하이라이트 영상도 매회 방송 직후 유통된다. 주요 명장면과 유머 요소를 짧게 편집해 소셜 미디어 이용자들의 유입을 꾀하는 전략이다. 디지털 공간에서 형성된 입소문이 실시간 본방송 시청률 상승으로 연결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방송사의 클립 제작 전담 부서도 확대되는 추세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집계한 유료방송 및 온라인 플랫폼 이용 현황에 따르면 복수의 유동 플랫폼을 중복 구독하는 가구 비율은 48 %를 넘어섰다. 시청자들은 지상파의 실시간 무료 방송과 유료 플랫폼의 오리지널 콘텐츠를 시간대와 상황에 맞춰 교차 소비하고 있다. 플랫폼 간의 경계가 흐려지는 가운데 콘텐츠 자체의 완성도와 몰입감이 선택의 절대적 기준이 되고 있다.
올해 하반기 지상파 3사는 9월 첫 주부터 총 14 편의 신작 미니시리즈와 주말 드라마를 차례로 선보인다. 국내외 주요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플랫폼 4개 사도 같은 기간 18 편의 오리지널 한국 드라마 시리즈를 순차적으로 서비스할 예정이다. 양측의 신작 드라마들은 평일 밤 9시 50분과 금요일 오후 4시를 기점으로 각각 시청자와 만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