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배전망 부족에 갇힌 친환경 전기와 국가 기간망 혁신 과제

기후위기 극복과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신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이 구조적 암초에 부딪혔다. 전국 각지에 태양광과 풍력 발전 설비가 빠른 속도로 들어섰지만 생산한 전기를 수요지로 실어 나를 송배전망이 턱없이 부족해 발전기를 강제로 멈춰 세우는 사태가 일상화되고 있다. 친환경 발전소를 아무리 많이 지어도 전기가 흐를 고속도로가 막혀 있다면 에너지 전환은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국가 에너지 대전환의 성패는 발전 설비의 보급 속도가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전력망 인프라의 확충 속도에 달려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와 전력거래소 자료에 따르면 호남과 제주, 동해안 등 주요 발전 밀집 지역에서 발생한 전력 출력제어(발전량을 인위적으로 줄이는 조치) 횟수는 해마다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2020년 제주에 국한됐던 출력제어는 최근 호남권 태양광 밀집 지역과 동해안 원전 및 석탄화력 발전 단지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생산된 전력을 받아줄 송전선로의 용량이 한계에 도달하면서 전력망 붕괴를 막기 위해 멀쩡한 발전기를 세우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전력거래소의 전력 계통 운영 실적에 따르면 제주 지역의 풍력 및 태양광 출력제어 횟수는 2015년 3 회에서 2023년 181 회로 급증했다. 호남 지역 역시 태양광 설비 용량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봄철과 가을철 등 냉난방 전력 수요가 적은 경부하 시기마다 수백 메가와트(MW) 규모의 출력제어가 정례화됐다. 전력망 용량이 초과되면 전력망 전체의 전압과 주파수가 흔들려 대규모 정전(블랙아웃)으로 이어질 수 있어 발전기를 강제로 차단하는 비상 조치가 일상이 된 셈이다.
이러한 전력망 병목 현상은 지역 간 전력 수급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신재생에너지 발전 설비는 일조량과 바람 조건이 우수한 남부권과 해안 지역에 집중돼 있다. 반면 전기를 대규모로 소비하는 대단위 공장과 첨단 산업단지, 대형 데이터센터는 수도권에 몰려 있다. 지방에서 만들어진 무탄소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대용량 초고압 송전선로가 필수적이지만 신규 전력망 건설은 주민 반대와 복잡한 인허가 절차에 묶여 극심한 지연을 겪고 있다.
실제로 한국전력공사가 추진하는 주요 초고압 송전선로 건설 사업의 평균 소요 기간은 과거 9 년 안팎에서 최근 13 년 이상으로 늘어났다. 동해안과 수도권을 연결하는 500 kV(킬로볼트) 초고압직류송전(HVDC) 사업이나 서해안 발전 전력을 북상시키는 송전선로 건설은 계획보다 수년씩 준공이 미뤄졌다. 발전소 건설 기간이 태양광은 1~2 년, 육상 풍력은 3~5 년, 해상 풍력은 5~7 년에 불과한 점을 고려하면 발전 설비와 송전망 간의 극심한 시차 불일치가 국가 전력 계통 전반의 위기를 초래한 근본 원인이다.
전력망 연계가 지연되면서 발전 허가를 받고도 계통에 접속하지 못해 대기 중인 이른바 '전력망 병목 대기 물량'도 기하급수적으로 쌓이고 있다. 한국전력공사 통계에 따르면 호남 지역에서 발전 사업 허가를 받았으나 송전망 용량 부족으로 전력망 연결 승인을 받지 못한 재생에너지 대기 용량은 수 기가와트(GW)에 달한다. 이로 인해 신규 발전 사업 허가가 사실상 전면 중단되는 계통 포화 지역이 전국 각지로 확산되는 추세다.
송전망 부족은 단순한 발전 제약에 그치지 않고 국가 전략산업의 미래 경쟁력까지 위협한다. 인공지능(AI) 기술 확산과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조성으로 향후 수도권의 전력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날 예정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가동에만 원자력 발전소 수 기 분량에 해당하는 10 GW 이상의 대규모 전력이 추가로 필요할 것으로 추산했다.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글로벌 기업들의 재생에너지 100% 사용(RE100) 요구에 대응하려면 대규모 무탄소 전력이 제때 산업 현장에 공급돼야 한다. 지방의 친환경 전기가 전력망 부재로 버려지는 동안 수도권 공장은 청정 전력을 구하지 못해 수출 경쟁력을 잃는 모순이 가시화되고 있다.
현장 사업자들의 경영난도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전남 해남군에서 500 kW(킬로와트)급 태양광 발전소를 운영하는 최모 씨(58)는 봄철과 가을철 주말마다 출력제어 통보를 받고 있다. 최 씨는 "막대한 대출을 받아 친환경 발전소를 지었지만 맑은 날 전력 생산이 절정에 달할 때마다 전력망이 꽉 찼다며 발전기를 끄라는 문자가 온다"며 "생산하지 못한 전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해 매달 수백만 원에 달하는 금융 이자를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이라고 털어놓았다.
풍력 발전 업계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제주도에서 소규모 풍력 발전 단지를 관리하는 강모 씨(46)는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일수록 발전기를 멈춰야 하는 황당한 일이 매년 반복되고 있다"며 "기기 가동을 멈추는 동안 발생하는 설비 손모와 전력 판매 수익 손실이 누적되면서 추가 설비 투자 계획은 전부 보류한 상태"라고 전했다.
전력 전문가들은 현재의 한전 주도 전력망 구축 체계가 한계에 봉착했다고 진단한다. 연구위원은 "전력망 건설이 늦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송전선로 경과지 주민들과의 갈등 해결 방식이 과거의 낡은 보상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며 "지역 주민들에게 단순 일회성 보상금을 지급하는 방식을 넘어 송전 인프라가 들어서는 지역에 세제 혜택이나 신산업 유치 등 구조적인 혜택을 주는 상생 모델로 전면 전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국전력공사의 누적 적자와 재무 악화도 전력망 투자를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최근 수년간 이어진 대규모 영업손실로 한전의 부채 규모가 200 조 원을 넘어서면서 천문학적인 재원이 소요되는 송배전망 신설 및 보강 사업이 계획대로 집행되지 못하고 있다. 연구위원은 "공기업 단독 재원에만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폭증하는 송전망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며 "민간 자본의 유치나 국가 재정의 직접 투입을 허용하는 등 전력망 재원 조달 다변화 방안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제도적 측면에서는 국회와 정부 차원의 패스트트랙(신속 처리 안건) 법제화가 시급한 과제로 꼽힌다. 현재 전력망 확충은 개별 지자체의 인허가와 각종 환경영향평가 등 수십 단계의 규제에 묶여 있다. 변호사는 "국가 안보 및 첨단 산업 경쟁력과 직결된 핵심 전력망에 대해서는 입지 선정부터 토지 수용, 인허가까지 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국가기간전력망 특별법 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범정부 전력망위원회를 신설해 지자체 간 이견을 신속하게 조율하고 행정 절차를 단축하는 특례를 부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해외 주요국들은 이미 전력망을 국가 안보 차원의 핵심 자산으로 규정하고 전폭적인 지원책을 펼치고 있다. 독일은 2011년 전력망확충가속화법(NABEG)을 제정해 송전선로 승인 절차를 대폭 간소화하고 전력망 운영에 필요한 인허가 기간을 절반 이하로 줄였다. 북부 해상풍력 단지에서 생산된 대규모 전력을 남부 공업지대로 보내기 위한 남북 송전선로 구축 프로젝트에 국가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미국 역시 초당적 인프라 투자 법안을 통해 연방 차원의 송전망 전담 기구를 만들고 국유지 내 전력망 구축에 대한 연방 승인권을 강화하는 등 국가 주도의 과감한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미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RC)는 송전망 계획 수립 규칙을 개정해 최소 20 년 앞을 내다본 장기 송전망 계획 수립을 의무화하고 비용 분담 원칙을 명문화했다.
한국 역시 분산형 전원 체계 구축과 함께 대규모 간선 전력망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투트랙 전략을 구체화해야 한다. 무작정 발전 설비 허가만 내주고 계통 수용성을 외면해 온 전력 정책의 우선순위를 '망(Grid) 중심'으로 재편해야 할 시점이다. 생산된 전력을 현지에서 직접 소비하도록 유도하는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의 현장 안착도 요구된다. 전기를 많이 쓰는 데이터센터와 제조업 시설을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비수도권 지역으로 분산 이전시키는 유인책이 결합돼야 전력망 과부하를 덜 수 있다.
에너지저장장치(ESS)와 전력 유연성 자원을 지역 거점마다 대거 확충해 전력망의 완충 능력을 키우는 작업도 병행돼야 한다. 낮 동안 잉여 발전된 태양광 전력을 대용량 배터리에 저장했다가 전력 소비가 몰리는 야간에 방전하는 계통 안정화용 에너지저장장치 구축이 필수적이다. 실시간 전력 시장 개설과 가격 입찰제 도입을 통해 전력 수급 상황에 맞게 가격 신호가 작동하도록 전력 시장 구조 자체를 고도화하는 조치도 요구된다.
신재생에너지 전환은 발전기의 숫자를 늘리는 단순한 양적 팽창이 아니다. 생산된 에너지를 가장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핏줄인 전력망이 완성될 때 비로소 국가 에너지 전환의 실효성이 담보된다. 전력망 확충을 민원 해결의 문제나 일개 공기업의 사업으로 치부해서는 탄소중립도 첨단 산업 육성도 요원하다. 정부와 국회가 국가 전력망 조기 구축을 위한 법적·제도적 기반 마련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제10차 장기 송변전설비계획에 따라 2036년까지 송배전 설비에 총 56조 5000억 원을 투자하기로 확정하고 관련 세부 실행 계획을 추진 중이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는 국가기간전력망 확충 특별법안이 회부되어 소위원회 중심의 법안 조문 심사가 진행되고 있다. 전력거래소는 지역별 전력 계통 여유 용량을 사전에 공개하는 전력망 정보 공개 시스템의 개편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전력공사는 345 kV 변전소 신설과 초고압 송전선로 경과지 주민들과의 대화 협의체를 구성해 현장 협의를 진행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