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공급 과잉 직격탄 맞은 소재 기업들 친환경 고기능성 포트폴리오 재편 속도

공장 굴뚝마다 뿜어져 나오던 기초유분 생산 열기가 고기능성 첨단 소재 공정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국내 주요 석유화학 산업단지 내 기업들이 기초 화학제품 위주의 생산 체제를 축소하고 친환경·고부가가치 중심의 스페셜티(Specialty) 제품군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전면 재편하고 나섰다. 나프타분해시설(NCC)을 통해 생산하던 에틸렌, 프로필렌 등 범용 플라스틱 원료의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하면서, 기술 진입장벽이 높고 부가가치가 큰 특수 화학 소재로 생존의 축을 옮기는 흐름이다. 과거 대규모 설비투자를 바탕으로 한 양적 성장 모델이 한계에 직면했다는 위기감이 업계 전반에 작용한 결과다.

이러한 체질 개선의 배경에는 아시아 시장을 중심으로 전개된 극심한 공급 과잉 현상이 자리 잡고 있다. 글로벌 최대 소비처였던 중국이 석유화학 자급률 100%를 목표로 초대형 NCC와 정유·석유화학 통합설비(COTC)를 잇따라 가동하면서 국내 기업들의 전통적 수출 시장이 급격히 축소됐다. 한국석유화학협회 집계에 따르면 동아시아 시장의 에틸렌 공급 과잉 규모는 연간 수천만 톤에 달하며, 나프타와 에틸렌 간의 가격 차이를 뜻하는 스프레드는 수년째 손익분기점인 톤당 300달러를 밑돌고 있다. 여기에 글로벌 경기 둔화에 따른 제조업 수요 위축까지 겹치면서 범용 제품을 생산할수록 손실이 누적되는 구조가 고착화됐다.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은 단순 감산을 넘어 설비 구조조정과 비핵심 자산 매각을 통해 마련한 재원을 미래 소재 분야에 집중 투입하고 있다. 기존 범용 라인의 일부를 폐쇄하거나 가동률을 최저 수준으로 낮추는 대신, 전기차 배터리용 분리막 원료, 탄소나노튜브(CNT), 반도체 공정용 고순도 화학물질 등 첨단 산업용 소재 생산 비중을 대폭 늘리는 추세다. 차량 경량화에 쓰이는 고기능성 엔지니어링 플라스틱(EP)과 초고분자량 폴리에틸렌(UHMWPE) 등 특수 폴리머 제품군으로의 공정 전환도 잇따르고 있다. 고기능성 제품은 고객사의 까다로운 요구 사양에 맞춰 맞춤형으로 공급되기 때문에 범용 제품과 비교해 경기 변동에 따른 가격 급락 위험이 상대적으로 적다.

친환경 순환 경제로의 전환 역시 사업 재편의 핵심 축을 형성하고 있다. 폐플라스틱을 화학적으로 분해해 다시 원유 상태의 원료로 되돌리는 열분해유 기술과 바이오 매스 기반의 생분해성 플라스틱 개발이 대표적이다. 유럽연합(EU)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이 플라스틱 재활용 의무화 비율을 강화하고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단계적으로 도입함에 따라, 탄소 배출량이 적은 친환경 소재는 단순한 규제 대응을 넘어 필수적인 시장 진입 조건으로 자리 잡았다. 주요 화학사들은 폐플라스틱 열분해 전용 공장을 신설하고 화학적 재활용 페트(CR-PET) 생산 라인을 확충하며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대응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의 구조적 변화 속에서 체질 개선을 늦출 경우 산업 생태계 전체가 경쟁력을 상실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연구위원은 "중국의 석유화학 자급화와 중동의 저가 에탄 기반 설비 증설로 인해 범용 에틸렌 시장에서 국내 기업이 가격 경쟁력을 회복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독일과 일본의 글로벌 화학 기업들이 과거 범용 사업을 과감히 매각하고 의약·농화학 및 첨단 전자소재 중심의 스페셜티 기업으로 탈바꿈했듯, 국내 산업도 고난도 기술이 요구되는 특수 소재 중심의 포트폴리오 다각화가 시급하다"고 설명했다. 원가 절감 중심의 방어적 경영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며, 기술 격차를 확보한 고수익 제품군으로의 과감한 사업 포트폴리오 이동이 불가피하다는 의미다.

현장에서는 범용 공정의 가동 조정과 고기능성 라인으로의 인력 재배치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석유화학 생산 공장에서 근무하는 김모 씨(48)는 "과거에는 기초유분 공장이 24시간 풀가동되며 생산량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지만, 최근에는 범용 라인의 보수 일정이 길어지고 특수 소재 배합 공정으로 인력이 재배치되는 경우가 늘었다"며 "다품종 소량 생산 체제에 맞춰 작업 공정과 품질 관리 기준이 완전히 달라져 현장에서도 새로운 설비 운전 기술을 익히는 교육이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전했다. 대량 생산에 익숙했던 제조 공정의 문법이 고객 맞춤형 특수 소재 생산 체계로 전환되면서 현장의 직무 구조 역시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셈이다.

연구개발(R&D) 투자 방향도 스페셜티 중심으로 재편됐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석유화학 업계의 전체 시설투자 규모는 보수적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연구개발비 지출에서 첨단 복합소재와 친환경 화학물질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년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기업들은 범용 제품 R&D 조직을 대폭 축소하고 차세대 모빌리티용 경량화 복합소재, 도심항공교통(UAM)용 고강도 탄소섬유, 고체전해질 등 배터리 차세대 원료 연구 부서를 신설하거나 외부 전문 인력을 적극 영입하고 있다. 일부 기업은 자체 개발에 드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기술력을 보유한 국내외 특수화학 벤처기업 지분을 인수하거나 전략적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방식을 병행하고 있다.

재무적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사업 정리 작업도 긴박하게 이뤄지고 있다. 합작법인 형태로 운영하던 범용 NCC 지분을 유동화하거나 한계 사업부를 분할 매각해 확보한 현금을 스페셜티 생산 라인 증설과 차입금 상환에 배분하는 식이다. 산업통상자원부와 금융당국 역시 산업 활력 제고를 위해 기업 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원샷법) 적용 대상을 확대하고, 사업 재편 승인을 받은 화학 기업에 대해 연구개발 지원과 세제 혜택, 금융 지원을 연계해 구조조정의 연착륙을 유도하고 있다. 정부는 범용 석유화학 설비 감축과 스페셜티 전환을 연계한 사업계획서를 제출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신속 심사 절차를 가동 중이다.

그러나 스페셜티 시장으로의 진입이 단기간에 대규모 실적 반등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는 분석도 적지 않다. 고기능성 화학 소재는 제품 개발부터 글로벌 고객사의 품질 인증 및 승인(Vendor Qualification)을 획득하기까지 통상 수년의 기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화학공학 전문가는 "스페셜티 소재는 진입장벽이 높은 만큼 시장 규모 자체가 범용 제품 대비 작고, 이미 시장을 선점한 글로벌 화학 선도 기업들의 특허 장벽이 견고하다"며 "범용 석유화학에서 거두던 수조 원 단위의 외형 매출을 단기간에 대체하기는 쉽지 않으므로, 장기적인 연구개발 투자 여력과 현금 흐름 관리를 병행하는 전략적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국내 기업들은 해외 거점의 활용 방식도 단순 생산 기지에서 현지 수요 맞춤형 스페셜티 가공 기지로 전환하고 있다. 북미와 유럽 등 선진 시장에서는 현지 규제에 맞춘 재활용 복합소재 컴파운딩(첨가제를 혼합해 물성을 개선하는 공정) 공장을 증설하고, 동남아시아와 인도 등 신흥 시장에서는 전자제품 및 자동차 부품용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판매망을 확대하고 있다. 범용 기초유분 수출길이 막히자 부가가치가 높은 가공 완제품을 현지에서 직접 생산해 공급하는 방식으로 유통 구조를 개편한 것이다.

무역 환경의 급격한 변화도 사업 재편을 재촉하는 주요 변수다. 글로벌 무역 통계에 따르면 미국과 EU 등 주요 수입국들은 플라스틱 제품의 재생원료 의무 함유율을 상향 조정하고 있으며, 특정 유해 화학물질에 대한 사용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기존 범용 합성수지 기반의 완제품 수출은 점차 규제 장벽에 부딪히고 있는 반면, 재활용 인증(ISCC PLUS)을 획득한 친환경 소재와 비불소계 특수 코팅제 등 친환경 제품군의 수출 단가는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환경 규제가 단순한 비용 증가 요인을 넘어 고부가 시장으로 진입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작용하는 양상이다.

국내 주요 석유화학 기업들은 올해 하반기부터 순차적으로 완공되는 스페셜티 및 재활용 소재 신규 생산 라인의 상업 가동에 돌입한다. 여수와 울산, 대산 등 주요 석유화학 단지에서는 초고순도 화학제품과 고기능성 복합수지 전용 설비가 본격적인 시운전을 거쳐 양산 단계로 전환된다. 기업들은 정기 주주총회와 이사회 공시를 통해 비핵심 범용 자산의 추가 매각 방침과 함께 친환경·첨단 소재 부문의 설비 가동 일정을 순차적으로 확정해 공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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