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사 제조사별 상세 이력 제공과 공공 인프라 화재 예방 점검 체계 구축 요구

도심 지하 주차장에서 시작된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충전 구역을 둘러싼 입주민 간 갈등과 안전에 대한 불안감이 일상 깊숙이 파고들었다. 친환경차 보급 정책에 발맞춰 빠르게 늘어난 전기차가 어느새 생활 속 잠재적 위험 요소로 인식되면서 주차 거부나 충전 시설 철거를 둘러싼 분쟁까지 곳곳에서 잇따르고 있다. 이동 수단의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기술적 도약만을 강조해 온 이면에 체계적인 안전망 구축과 소비자의 알 권리 보장이 뒤처져 있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친환경성과 경제성을 앞세워 급성장한 전기차 시장은 최근 잇단 열폭주(배터리 온도가 급격히 상승하며 연쇄 폭발을 일으키는 현상) 사고로 커다란 시험대에 올랐다. 국토교통부 등록 통계에 따르면 국내 전기차 누적 등록 대수는 60만 대를 넘어섰으며 신차 시장에서의 점유율도 빠르게 확대되는 추세다. 그러나 전기차 가격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배터리 제조사와 내부 셀 구성 등 핵심 부품에 대한 세부 정보는 오랫동안 철저히 비공개로 유지되어 왔다.
내연기관 차량의 경우 엔진 형식과 배기량은 물론 주요 부품의 공급처와 제조 국가가 자동차등록증과 사양서에 명확히 표기되는 구조다. 반면 전기차는 화재 위험도와 직결되는 배터리 셀 제조사조차 계약 관계상의 비밀이라는 이유로 차주에게 제대로 고지되지 않았다. 동일한 모델의 차종이라 하더라도 생산 시기나 출고 공장에 따라 서로 다른 제조사의 배터리가 무작위로 교차 장착되는 관행이 이어지면서 소비자들은 자신이 모는 차량의 기본 제원조차 알지 못한 채 운행을 이어왔다.
정보의 비대칭성은 시장 전반에 걸친 불신을 증폭시키고 중고차 거래와 사후 관리 체계 전반을 흔들고 있다. 최근 여론의 압박에 따라 일부 완성차 제조사가 자발적으로 배터리 제조사 정보를 웹사이트에 공시하기 시작했으나 이는 브랜드 이름만 나열한 초보적 조치에 불과하다. 배터리 셀 제조사뿐만 아니라 양극재 소재 구성비(NCM, LFP 등), 제조 일자, 패킹 설계 방식, 개별 팩의 시리얼 번호 등 화재 위험성과 잔존 가치 산정에 직결되는 핵심 정보는 여전히 공개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완성차 제조사 관계자는 글로벌 공급망 변동성과 원자재 수급 상황에 따라 배터리 수급처를 다변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구조가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부품 공급사와의 계약 조건상 세부적인 내부 화학 구성이나 단가 구조가 노출될 경우 가격 경쟁력에 타격을 입을 수 있어 실시간 정보 갱신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제조 공정상의 품질 검사와 출고 전 사전 안전 테스트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안전성을 입증하겠다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공학계와 방재 전문가들의 평가는 사뭇 다르다. 연구위원은 배터리 화재는 단순한 제조 결함뿐만 아니라 미세 단락, 과충전, 하부 물리 충격, 침수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하기 때문에 셀 제조사부터 배터리 관리 시스템(BMS)의 이상 감지 이력까지 투명하게 추적할 수 있는 공공 플랫폼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부품의 출처와 이력을 가리는 관행은 사고 발생 시 책임 소재를 모호하게 만들고 소비자의 합리적인 선택권을 박탈한다는 설명이다.
배터리 정보의 투명한 공개와 함께 시급한 과제로 떠오른 것은 공공 및 공동주택 충전 인프라의 물리적 안전망 강화다. 소방청 화재 통계에 따르면 전기차 화재는 전체 등록 대수 대비 발생 비율이 내연기관 차량보다 월등히 높지는 않으나 진압에 소요되는 시간과 진화 용수 소모량은 압도적으로 많다. 특히 국내 주거 환경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아파트 등 공동주택은 주차 공간이 대부분 지하에 밀집해 있어 화재 발생 시 소방차 진입이 불가능하고 열기와 농연이 빠져나가지 못해 대형 참사로 번지기 쉽다.
실제로 현장에서 전기차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상적 갈등은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 수도권의 한 대단지 아파트에 거주하며 매일 출퇴근길에 전기차를 이용하는 최모 씨(42)는 최근 입주자대표회의에서 지하 주차장 충전 시설 운영 중단과 충전율 80% 제한 조치가 의결되면서 이웃들과 잦은 마찰을 빚고 있다. 최 씨는 안전에 대한 주민들의 불안감은 이해하지만 내 차에 어떤 배터리가 들어갔는지 제조사조차 명확히 확인해주지 않아 항변할 근거가 없는 현실이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비전기차를 운행하는 입주민들의 불안 역시 구체적인 근거를 두고 있다. 같은 아파트 입주민 정모 씨(38)는 지하 2층 주차장에서 불이 날 경우 연기 배출 시설이 부족하고 스프링클러가 작동하더라도 배터리 자체의 화학 반응을 차단하기 어렵다는 소식을 접한 뒤 충전 구역 인근 주차를 극력 피하고 있다고 밝혔다. 위험 부담은 입주민 전체가 지는데 관련 정보나 방재 장비는 전무한 상황에서 갈등이 생기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지적이다.
충전 인프라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양면에서 체계적인 기술 표준을 세우는 일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환경부와 한국전력공사가 과거 보급한 완속 충전기 중 다수는 차량 내부의 배터리 상태 정보를 실시간으로 주고받으며 과충전을 통제하는 PLC(전력선 통신) 모뎀이 탑재되지 않은 단순 전류 공급형 모델이다. 배터리가 100% 충전된 이후에도 미세 전류가 지속적으로 유입되거나 내부 셀 간 전압 불균형이 발생할 때 충전기가 이를 인지해 차단하지 못하면 열폭주 위험성은 급격히 증가한다.
안전 기준을 선진화하기 위해서는 완속 충전기에도 화재 예방형 스마트 제어 모뎀 설치를 의무화하고 기존 설비를 전면 교체해야 한다. 동시에 지하 주차장 충전 구역에는 화재 징후를 조기에 포착하는 열화상 감지 센서, 질식소화포(불꽃과 산소를 차단하는 특수 덮개), 이동식 소화수조 구비가 법적 설치 요건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충전 사업자 역시 단순 설치 보조금 수령에 그치지 않고 주기적인 절연 저항 측정과 차단기 작동 점검을 수행하도록 유지보수 책임 규정이 강화되어야 한다.
정부 부처 간에 파편화된 규제와 관리 책임 체계도 신속히 정비되어야 한다. 현재 전기차 안전 관련 정책은 차량 인증과 안전 기준을 관할하는 국토교통부, 충전기 보급과 환경 보조금을 담당하는 환경부, 소방 시설과 화재 대응 기준을 세우는 소방청, 산업 육성과 에너지 정책을 맡은 산업통상자원부로 나뉘어 있다. 부처 간 협업 미비로 인해 배터리 사전 인증제와 소방 설비 기준 통일이 지연되면서 일선 지자체와 아파트 관리 현장은 명확한 지침 없이 자체 규제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친환경차 시대로의 전환은 거스를 수 없는 산업적 흐름이지만 이는 이용자와 사회 공동체의 신뢰라는 튼튼한 토대 위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 화재 공포를 단순한 혐오로 치부하거나 제조사의 영업 비밀 뒤에 숨는 태도로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기술의 한계를 투명하게 인정하고 정확한 부품 정보 공개와 철저한 인프라 보강을 통해 위험을 통제 가능한 범위로 끌어내리는 행정적 조치가 시급하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배터리 안전성 인증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자동차관리법 하위 법령 개정안을 확정하고 배터리 이력 관리 시스템 구축에 착수했다. 국토교통부는 신규 및 등록 차량의 배터리 식별번호 등록을 의무화하고 정기 검사 시 배터리 성능과 결함 여부를 진단하는 체계를 단계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환경부와 소방청은 지하 주차장 내 스마트 제어 충전기 보급 지원을 확대하고 특수 소방 장비 확충을 위한 지침을 전국 지자체에 배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