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유 상품 유지한 채 금융사 이동 가능해지며 수익률 중심 머니무브 가속

가입자가 기존에 보유한 투자 상품을 매도하지 않고 다른 금융사로 그대로 옮길 수 있는 퇴직연금 실물이전(현물이전) 제도가 본격 가동되면서 400조 원 규모에 달하는 퇴직연금 시장의 판도 변화가 가시화되고 있다. 그동안 퇴직연금 계좌를 다른 금융기관으로 변경하려면 보유 중이던 정기예금이나 펀드, 상장지수펀드(ETF) 등을 모두 현금화해야 해 중도 해지에 따른 금리 손실이나 환매 수수료 부담이 컸다. 이번 제도 개선으로 자산 매각 없이 원형 그대로 사업자를 바꿀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서 금융권 전반에 걸친 고객 유치 경쟁이 한층 달아오르고 있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매년 두 자릿수 성장세를 이어가며 대형 자산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확정급여형(DB), 확정기여형(DC), 개인형 퇴직연금(IRP) 가운데 특히 가입자가 직접 운용 권한을 갖는 DC형과 IRP 계좌의 비중이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다. 최근 수년간 전체 적립금 중 실적배당형 상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꾸준히 늘었으나, 여전히 전체의 80% 이상이 원리금 보장 상품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안정적인 원리금 보장 상품에 묶여 있던 자금들이 수익률 제고를 위해 실적배당형 상품으로 이동하는 흐름이 뚜렷해진 가운데, 실물이전 제도는 이러한 머니무브(자금 이동)의 속도를 끌어올리는 기폭제로 작용하고 있다.

시중은행들은 기존의 압도적인 점유율을 지키기 위해 자산관리(WM) 상담 인력을 대폭 보강하고 비대면 관리 시스템을 정비하고 있다. 은행권은 원리금 보장 상품의 라인업을 다양화하는 동시에 주기적인 포트폴리오 리밸런싱(자산 재배분) 알림 서비스를 강화하며 이탈 방어에 집중하는 모양새다. 주요 은행들은 퇴직연금 전담 프라이빗뱅커(PB) 센터를 확대 운영하며 은퇴 설계를 앞둔 중장년층 고객을 대상으로 맞춤형 세무 및 연금 수령 솔루션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아울러 인공지능(AI) 기반 로보어드바이저를 도입해 가입자의 투자 성향과 생애주기에 맞춘 자동 자산 배분 알고리즘을 고도화하고 있다.

증권업계는 실적배당형 상품의 경쟁력을 앞세워 공격적인 고객 유입에 나섰다. 증권사들은 다양한 국내외 주식형 ETF와 채권형 ETF, 리츠(REITs·부동산투자회사) 등 폭넓은 투자 선택지를 강점으로 부각하고 있다. 실시간 매매가 가능한 모바일 트레이딩 시스템(MTS)의 편의성을 개선하고, 장기 투자 시 복리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운용 보수 인하 혜택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다. 일부 증권사는 타사에서 넘어오는 가입자를 대상으로 모바일 상품권 지급이나 수수료 면제 혜택을 제공하는 등 마케팅 역량을 쏟아붓고 있다. 또한 연금 전담 콜센터 운영 시간을 야간까지 연장해 퇴근 후 비대면 상담을 원하는 직장인 수요를 공략하고 있다.

보험업계 역시 장기 금리 경쟁력을 내세운 이율보증형 상품과 평생 연금 지급 방식을 결합한 은퇴 맞춤형 상품을 선보이며 틈새시장 공략에 나섰다. 금리 변동기에 안정적인 이자 수익을 추구하는 가입자를 겨냥해 금리 연동형 상품의 최저보증이율을 차별화하고, 연금 수령 단계에서 종신 수령을 원하는 고객층을 선점하겠다는 전략이다. 생명보험사들은 은퇴 후 매달 일정 금액을 사망 시까지 보장하는 종신연금 수령 기능을 앞세워 고령층 고객의 자산 이탈을 방어하고 있다. 각 업권마다 제공하는 상품 구조와 운용 방식이 뚜렷하게 갈리면서 가입자의 투자 성향에 따른 이동 흐름이 본격화되고 있다.

이와 맞물려 도입된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 역시 금융사 간 수익률 비교 지표로 정착하며 이전 수요를 자극하고 있다. 디폴트옵션은 가입자가 별도의 운용 지시를 내리지 않을 경우 사전에 정해둔 포트폴리오로 자산이 자동 운용되도록 하는 장치다. 금융당국이 분기마다 공시하는 디폴트옵션 상품별 수익률과 수수료율 정보는 가입자들이 사업자의 운용 역량을 객관적으로 비교 평가하는 핵심 기준이 되고 있다. 초저위험부터 고위험까지 등급별 수익률 격차가 뚜렷하게 나타나면서 실적이 부진한 금융사에 머물던 가입자들이 공시 지표를 확인한 뒤 실물이전을 신청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배경이다.

한 금융투자업계 연구위원은 "과거에는 퇴직연금 계좌를 바꾸려면 약정 금리를 포기하거나 펀드 환매 기간 동안 발생하는 기회비용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에 가입자의 이동성이 극도로 제한적이었다"라며 "실물이전 인프라가 구축되면서 이제는 철저하게 장기 수익률과 자산관리 서비스의 질에 따라 자금이 재배치되는 구조가 정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수수료 체계와 사후 관리 능력이 사업자의 핵심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퇴직연금 이전을 검토할 때 장기 복리 효과와 절세 구조를 함께 살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세무사는 "퇴직연금은 납입 단계의 세액공제와 운용 단계의 과세이연, 수령 단계의 저율 과세 혜택이 결합된 종합 절세 계좌"라며 "단기적인 이벤트성 혜택이나 단기 수익률에 매몰되기보다 장기 수수료율과 인출 시점의 세금 전략을 사전에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계좌 관리 수수료 면제 여부와 편입 펀드의 총보수가 10년 이상 장기 투자 시 실질 수령액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덧붙였다.

실제 연금 자산 관리에 나선 직장인들의 움직임도 분주하다. 제조업체에서 근무하는 김모 씨(43)는 입사 이후 줄곧 거래 은행의 DC형 계좌를 통해 정기예금 위주로 퇴직연금을 관리해 오다 최근 증권사로의 실물이전을 마쳤다. 김 씨는 "은퇴까지 10년 이상 남은 시점에서 예금 금리만으로는 물가상승률을 따라잡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라며 "보유하고 있던 채권형 펀드를 해지하지 않고 그대로 이전해 미국 지수 추종 ETF를 추가 매수하는 포트폴리오를 구성했다"고 말했다.

IT 기업에 근무하는 최모 씨(37) 역시 수수료 절감을 위해 IRP 계좌를 이전했다. 최 씨는 "여러 금융사에 흩어져 있던 IRP 계좌의 관리 수수료를 비교한 뒤 온라인 전용 무수수료 혜택을 제공하는 금융사로 자산을 한데 모았다"라며 "매매 손실 없이 보유 펀드를 그대로 이전할 수 있어 절차가 간편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자산의 안전성을 우선순위에 두고 은행 계좌를 유지하거나 타 금융사에서 은행으로 역이전하는 사례도 존재한다. 공기업에 재직 중인 박모 씨(52)는 "은퇴 시점이 몇 년 남지 않은 상황에서는 원금 손실 위험을 최소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라며 "원리금 보장 상품의 금리가 유리하고 은퇴 후 연금 수령 상담을 대면으로 상세히 받을 수 있는 시중은행으로 IRP 계좌를 집중했다"고 밝혔다.

퇴직연금 실물이전 제도를 활용할 때는 모든 상품이 무조건 옮겨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실물이전은 동일한 유형의 퇴직연금 제도 간에만 가능하다. 즉 DB형은 DB형 간에, DC형은 DC형 간에, IRP는 IRP 간에만 실물이전이 허용된다. 다만 DB형의 경우 이직 전 근로자가 동일 사업장 내에서 다른 금융사로 이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DC형 또한 사업장이 복수의 퇴직연금 사업자와 계약을 맺고 있는 경우에 한해 가입자가 금융사를 선택해 이전할 수 있다.

또한 이전하려는 금융사에서도 동일한 상품을 취급하고 있어야 실물이전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특정 은행의 전용 정기예금이나 특정 증권사에서만 독점 판매하는 파생결합사채(ELB) 등은 이전 대상 금융사에서 취급하지 않을 경우 현물 상태로 이전할 수 없다. 디폴트옵션으로 지정되어 운용 중인 상품이나 지급보증이 들어간 특정 신탁 상품, 보험형 자산관리계약 등 일부 자산도 제도상 실물이전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 경우 해당 상품만 매도해 현금으로 전환한 뒤 이전하거나, 이전 대상에서 제외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가입자는 이전을 신청하기 전 자신이 보유한 상품 목록이 이전 대상 금융사에서 온전히 수용될 수 있는지 사전 조회를 거쳐 확인해야 한다. 실물이전이 불가능한 상품이 포함된 경우 환매에 수일에서 수주가 소요될 수 있으므로 전체 이전 완료 시점까지의 자산 운용 계획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아울러 펀드나 ETF 등 실적배당형 상품의 경우 결제 주기에 따라 매매 주문이 체결되는 기간 동안 실물이전 신청이 일시적으로 제한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연금 자산의 절세 혜택을 극대화하기 위한 종합적인 계좌 점검도 요구된다. IRP 계좌는 연간 납입액에 대해 최대 900만 원까지 세액공제 혜택이 주어지며,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만기 자금을 연금 계좌로 전환할 경우 추가적인 세액공제 한도가 부여된다. 만기 ISA 자금 전환 시 전환 금액의 10%, 최대 300만 원까지 추가 세액공제가 가능해 한 해 최대 1200만 원까지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연금 수령 단계에서 발생하는 연금소득세율은 수령 연령에 따라 3.3%에서 5.5% 수준으로 차등 적용되므로, 단순한 계좌 이전을 넘어 은퇴 이후의 현금 흐름과 인출 계획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 포트폴리오를 설계해야 한다.

금융당국과 금융결제원은 가입자의 편의를 높이기 위해 퇴직연금 실물이전 신청 절차를 비대면 채널로 일원화하고 처리 기간을 대폭 단축했다. 가입자는 새로 거래하고자 하는 금융사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이나 영업점을 통해 이전 신청을 접수할 수 있으며, 기존 금융사를 직접 방문해 해지 절차를 밟을 필요가 없다. 금융당국은 시스템 개편 이후 금융사 간 실물이전 처리 현황과 상품 편입 적합성을 상시 점검하고 있다. 통합연금포털에서는 각 금융사의 퇴직연금 제도별 적립금 규모, 평균 수익률, 총비용부담률 등의 정보를 정기적으로 공시하고 있다.

저작권자 © 스페셜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