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나비 필라이(85) 국제사법재판소(ICJ) 임시 재판관이 202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자 이스라엘 정부가 강하게 반발했다. 필라이가 이끈 유엔 조사위원회가 2025년 9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내 집단학살(제노사이드)을 결론으로 발표한 일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이스라엘 외무부는 9일(현지시간) 노벨위원회가 “21세기 최대의 거짓말에 상을 수여했다”고 주장했고, 총리실도 노벨위원회가 “도덕적 나침반을 상실했다”고 비난했다. 반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외무부는 수상은 “지극히 마땅한 결과”라며 환영했다. 노벨위원회는 필라이가 평화와 국제법 발전에 기여했고 전쟁범죄와 반인도범죄, 집단학살 범죄가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수상 발표 뒤 맞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입장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9일 필라이를 202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위원회는 필라이가 “탁월한 용기와 강직함을 바탕으로 더욱 포괄적인 국제법 질서 구축에 앞장서 온 인물”이라며 “전쟁 범죄와 반인도 범죄, 집단학살 범죄가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해왔다”고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위원회는 개인과 국가가 법치주의를 지켜야 할 책임을 강조해 온 점도 소개했다.
이스라엘 외무부는 같은 날 성명을 내고 수상 결정에 반발했다. 외무부는 “만일 거짓말, 증오, 그리고 피의 중상모략에 대해 상을 준다면 나비 필라이는 단순한 후보가 아니라 선두주자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스라엘을 악마화하고 제노사이드라는 거짓 선동을 조장하는 데에 있어 그가 보여준 정치적 의도가 다분한 행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밝혔다. 외무부는 “필라이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하는 것은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 아니다”며 “이는 반이스라엘 증오와 편견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을 기괴하게 무기화하는 행태일 뿐”이라고 비난했다.
외무부는 필라이를 나치 독일의 선전·선동을 주도한 요제프 괴벨스에 빗대기도 했다. 외무부는 노벨위원회가 “21세기 최대의 거짓말에 상을 수여했다”며 “요제프 괴벨스가 지옥에서 환호하고 있겠다”고 밝혔다. 이스라엘 총리실도 별도 성명에서 노벨위원회가 “도덕적 나침반을 상실했다”고 주장했다. 총리실은 필라이를 “유일한 유대인 국가를 상대로 피의 중상모략을 조작하고 유포하는 것으로 경력을 쌓아온 편협한 인물”이라고 표현하고, “나비 필라이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업적은 부패한 검사에게 정당성을 부여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가자지구 조사위원회 보고서가 비난의 쟁점
이스라엘 정부가 문제 삼은 것은 필라이가 이끈 유엔 인권이사회 조사위원회의 가자지구 관련 보고서다. 위원회는 2025년 9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주민을 상대로 집단학살을 저질렀다는 결론을 발표했다. 참고 기사에 따르면 보고서는 2023년 10월 7일부터 2025년 7월 31일까지의 조사를 토대로 작성됐으며, 집단학살 방지 협약에 규정된 다섯 가지 행위 가운데 집단 구성원 살해를 포함한 네 가지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위원회는 이스라엘 정부와 군대가 협약 위반에 해당하는 행위를 했다고 밝혔다.
조사위원회는 보고서에서 가자지구의 굶주림과 의료체계 파괴 등도 다뤘다. 한 참고 기사에 따르면 위원회는 굶주림이 전쟁 무기로 사용됐고 의료체계가 고의로 파괴됐다는 조사 결과를 제시했다. 또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를 비롯한 이스라엘 고위 관리들이 집단학살을 선동했다고 결론지었다. 필라이가 이끄는 위원회의 결론에 대해 이스라엘은 보고서가 왜곡됐고 거짓이라며 반박해 왔다. 이스라엘 외무부는 이번 수상 비난 성명에서도 해당 결론을 “제노사이드라는 거짓 선동”이라고 규정했다.
이스라엘 외무부는 성명에서 나치 선전 책임자 괴벨스를 언급하며 노벨위원회가 “21세기 최대의 거짓말에 상을 수여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위원회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행위를 집단학살로 판단한 내용을 겨냥한 표현이다. 반면 PA 외무부는 필라이의 조사위원회 활동을 평가하며 “이스라엘이 자행한 집단학살, 성폭력, 아동을 표적으로 한 공격 등 기타 범죄혐의를 폭로하고 기록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PA 외무부는 필라이가 “국제질서의 초석인 법의 우위와 그 핵심 원칙인 정의를 수호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고 덧붙였다.
국제재판과 유엔 인권 분야에서 쌓은 이력
필라이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으로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초대 재판관 가운데 한 명으로 활동했다. 참고 기사에 따르면 그는 194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의 인도계 타밀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옛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 정권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저항한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 등 정치범의 인권 보호에 힘썼다. 1995년 남아프리카공화국 고등법원 판사로 임명된 뒤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ICTR)와 ICC에서도 재판관으로 활동했다.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에서는 성폭행이 반인도범죄뿐 아니라 집단학살 범죄에도 해당할 수 있다는 판단 과정에서 필라이의 역할이 중요했다고 노벨위원회 관련 보도는 전했다. 필라이는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유엔 인권최고대표를 지냈다. 당시 세계 각국의 인권 상황을 감시하고 피해자의 목소리를 대변했으며, 유엔 차원에서 북한 인권 문제를 공식 제기했다. 북한 인권조사위원회를 설치해 가동하고 국제사회가 북한을 ICC에 회부해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도 내놓았다.
필라이는 2021년부터 2025년까지 유엔 팔레스타인 점령지 독립국제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이 위원회가 지난해 9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내 집단학살 결론을 발표한 뒤 이스라엘은 보고서가 왜곡됐다고 주장하며 조사위원회를 해체하라고 요구했다. 필라이는 현재 미얀마가 집단학살 혐의로 제소된 ICJ 사건에서 재판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노벨위원회는 필라이가 역사적인 국제 재판을 통해 법적 조치가 전쟁과 폭력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위원회는 그가 국가와 국가 지도자에게 책임을 물었고, 폭력과 분쟁의 피해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줬다고 밝혔다.
뉘른베르크에서 밝힌 수상 소감과 ICC 제재 비판
필라이는 수상 소식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접했다. 그는 나치 전범재판이 열린 사법전당 600호 법정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 중이었다. 필라이는 “이 상을 국제 범죄의 모든 생존자들과, 국제 사법의 실무자와 수호자들에게 바친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국제법과 인권이 중대한 정치적 공격을 받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며 특히 국제형사재판소에 대한 공격에서 이런 현실이 두드러진다고 밝혔다.
필라이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ICC 제재를 비판했다. 그는 국제 형사 사법을 약화하려는 시도가 뉘른베르크 이후 이뤄낸 진전을 위협하고, 법이 아니라 힘이 누구의 고통이 중요한지를 결정하는 세상으로 되돌릴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또 정치 지도자들에게 인권을 보호하고 전쟁을 피하며 유엔 헌장을 현실로 만들어야 할 법적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국제형사재판소에 대한 공격과 같이 불량 국가들(rogue states)이 독단적 행동을 취해서는 안 된다”고도 말했다.
이스라엘 총리실은 이날 미국이 ICC 제재 방침을 밝힌 것과 관련해 네타냐후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과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에게 “중대한 결정을 내려줘 감사하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ICC에 대해 “ICC는 법원이 아니라 전세계 법치 민주주의 국가와 국가주권이라는 개념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는 정치적 기구”라고 비난했다. 총리실이 필라이의 업적으로 지목한 검사는 카림 칸 전 ICC 검사장이다. 칸은 2024년 5월 가자지구 전쟁과 관련해 네타냐후 총리와 하마스 수뇌부에 대한 체포영장을 청구했다. 그는 여직원 성추행 의혹을 받았고, 올해 7월 해임됐다.
노벨위원회는 이번 수상으로 국내외 법치주의가 평화를 보장하고 분쟁을 비폭력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구축한 체계의 근간임을 알리고자 한다고 밝혔다. 노벨상 수상자는 상금 1200만 스웨덴 크로나와 메달, 증서를 받는다. 올해 노벨상 발표는 오는 12일 경제학상 수상자 발표로 마무리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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