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부 연예인의 선조 친일 행적이 논란이 되면서, 일제강점기의 선택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어떤 기억과 책임으로 남아야 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고 있다. 조상의 잘못을 후손에게 물을 수 없다는 원칙은 분명하지만, 국권 회복을 위해 삶의 터전을 버리고 국경을 넘었던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조상의 나라에서 일용직과 공장 노동 등으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별개의 문제로 남아 있다.

광주 고려인마을에 정착해 활동 중인 세계적인 고려인 화백 문빅토르가 2025년 완성한 작품 ‘운명의 연대기’가 이 엇갈린 역사를 한 화면에 압축해 보여주며 묵직한 물음을 던진다. 60×78㎝ 캔버스에 수채화와 아크릴로 그려진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와 전쟁, 강제이주와 유랑으로 이어진 고려인의 굴곡진 역사를 담았다.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세 장면 속 군인과 피란민, 말을 끄는 사람들, 수레를 진 인물들은 서로 다른 시대에 등장하지만 그 발걸음은 하나의 흐름처럼 연결돼 있다.

고려인 선조들은 국권 회복을 위해 고향을 등지고 러시아 연해주와 북간도로 향해 학교와 신문을 만들고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했으며, 최재형과 홍범도 등도 연해주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 정권은 이들을 일본의 첩자로 의심해 탄압했고, 화물열차에 실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됐다. 이동 과정에서 질병과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었고, 살아남은 이들 앞에는 집도 농토도 없는 황무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에는 언어와 민족적 배경으로 다시 차별과 불안을 겪으며 상당수가 조상의 나라 대한민국으로 눈을 돌렸으나, 외국 국적 동포라는 법적 지위와 언어 장벽, 체류자격의 제약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 광주 고려인마을에 정착한 동포 상당수도 농촌 일용직과 공장 노동, 파견근로 등 단순노무직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국경을 넘었던 선조와 달리, 그 후손들은 되찾은 조국에서 다시 자신이 누구인지를 설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셈이다. 작품 곳곳에 그려진 붉은 인물들은 시대마다 반복된 배신과 권력, 욕망을 상징하고 화면 아래 금전과 보물을 연상시키는 형상은 개인의 선택이 공동체의 운명에 얼마나 긴 그림자를 남기는지를 보여준다. 최근의 친일 논란 역시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후손을 비난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라를 되찾기 위해 희생한 이들을 우리 사회가 제대로 기억하고 예우해 왔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문빅토르는 “나는 운명을 좋아하지 않는다”면서도 “고려인과 한국인의 역사를 보면 시대는 달라도 비슷한 상황과 역할이 반복돼 결국 운명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은 과거의 운명만이 아니다”며 “오늘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다음 세대가 살아갈 또 다른 연대기가 된다”고 말했다. 신조야 고려인마을 대표는 “우리 고려인은 나라를 버리고 떠난 사람들이 아니라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국경을 넘었던 사람들의 후손”이라며 “100여 년의 유랑 끝에 다시 조상의 땅으로 돌아와 삶을 일구고 있다는 사실을 대한민국이 기억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또 “과거 친일의 역사를 후손 비난으로 이어가자는 게 아니라 독립을 위해 희생한 이들과 후손의 삶을 함께 돌아보자는 것”이라며 “그것이 역사를 기억하는 오늘 세대의 책임”이라고 덧붙였다.

작품 속 인물들은 나라를 잃고 연해주로 떠난 첫걸음부터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소련 해체 후의 이주, 그리고 마침내 대한민국으로 향한 걸음까지 100년 넘게 걷고 있다. 그 발걸음이 더 이상 ‘유랑’이 아닌 온전한 ‘귀환’으로 기록될 수 있을지는, 결국 오늘을 사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묵직한 질문을 이 그림은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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