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끝이 허공을 가르고 절도 있는 춤사위가 무대를 채운다. 부드러움과 거침없음을 오가는 몸짓 안에는 나라를 지키려 싸웠던 선조들의 기상과 강제이주의 고난을 견뎌낸 고려인의 정신이 배어 있다. 광주 고려인마을 산하 새날학교 고등반 2학년에 재학 중인 이아나스타시아(18)양이 선보이는 전통검무다.
22일 광주 고려인마을에 따르면 이 양은 우즈베키스탄에서 다섯 살 무렵부터 춤을 배우기 시작해 현지 고려인무용단 ‘모란봉’ 단원으로 활동했다. 중앙아시아 순회공연과 여러 무대에서 기량을 쌓았고 카자흐스탄에서 열린 경연대회 대상을 비롯해 여러 차례 실력을 인정받은 바 있다.
2023년 귀환을 결정한 부모를 따라 한국에 들어온 이 양은 광주 고려인마을에 정착했다. 낯선 조상의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어릴 적부터 익힌 검무는 자신의 뿌리와 고려인 정체성을 드러내는 언어가 됐다. 이후 매년 마을에서 열리는 3·1절 만세운동 재현행사와 광복절 봉오동전투 재현행사, 기념음악회, 고려인의 날 등 역사문화행사 무대에 꾸준히 올랐다.
이 양의 검무는 단순한 무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양손에 검을 쥐고 펼치는 빠르고 힘찬 동작과 절제된 몸짓은 연해주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이어갔던 고려인 선조들의 기개를, 그리고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뒤에도 민족 문화와 정체성을 지켜온 고려인들의 삶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 지난 15일 열린 제81주년 광복절 기념음악회 무대에서도 그는 검무를 선보였고, 객석에서는 박수와 환호가 이어졌다. 한 소녀의 춤이 세대를 넘어 역사를 되새기게 했다는 점에서, 이번 무대는 단순한 공연을 넘어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기억을 잇는 장면으로 읽힌다.
이 양의 검무가 각별한 이유는 중앙아시아에서 세대를 이어온 고려인 문화가 후손을 통해 조상의 땅에서 다시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검끝에는 과거의 기억뿐 아니라 새로운 삶을 개척해가는 고려인 청소년 세대의 모습도 함께 담겨 있다.
이 같은 문화 전승은 마을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고려인문화관은 선조들의 독립운동사와 한글문학, 강제이주와 생활사를 보여주는 유물 1만2천여 점을 소장하며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보존하고 있다. 고려인어린이합창단과 청소년오케스트라 ‘아리랑’, 아리랑가무단, 문빅토르미술관 등도 공연과 전시를 통해 고려인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고 있다.
신조야 고려인마을 대표는 “아나스타시아 양의 검무에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선조들의 기상과 수많은 고난을 견뎌낸 고려인의 강인한 생명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며 “중앙아시아에서 익힌 춤을 조상의 나라에서 펼치며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이어가는 모습은 주민들에게 깊은 감동과 자긍심을 안겨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고려인마을은 역사자료를 보존하고 알리는 데 머물지 않고, 청소년들의 노래와 연주, 춤과 미술 등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 선조들의 역사와 정신이 다음 세대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살아있는 역사문화마을로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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