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총회·G20 연쇄 정상회담서 리튬·희토류 통상 협력 및 기술 연대 집중 논의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첨단기술과 핵심 자원 통제로 번지면서 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도가 한층 빨라지고 있다. 주요 선진국들이 자국 중심의 공급망 구축을 위해 규제 장벽을 높이는 가운데, 한국 외교·안보 당국은 올가을 예정된 다자외교 일정을 경제 안보의 외연을 넓히는 핵심 분수령으로 삼고 있다. 유엔총회를 시작으로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와 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가 잇따라 열리는 하반기는 복합 위기에 직면한 한국 경제의 활로를 모색할 중요한 무대로 꼽힌다. 반도체, 이차전지, 핵심 광물 등 국가 핵심 산업의 대외 의존도를 낮추고 수입선을 다변화해야 하는 과제가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기 때문이다.
외교부와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정부는 하반기 다자외교 무대에서 핵심 광물 안보 파트너십을 포함한 다자간 경제 안보 협의체를 적극 활용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미중 갈등 장기화로 공급망 블록화가 가속화하는 상황에서 특정 국가에 편중된 공급망 구조는 산업 전반의 치명적인 리스크로 작용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통계를 보면 국내 주요 제조업의 핵심 원자재 특정국 수입 의존도는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작은 통상 마찰이나 수출 통제 조치에도 국내 생산 라인이 직격탄을 맞을 수 있는 취약성을 안고 있다. 정부가 다자외교의 초점을 실질적인 자원 외교와 기술 안보 공조에 맞추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과의 협력은 이번 다자외교 일정에서 가장 중요한 축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아세안 지역은 니켈, 보크사이트, 희토류 등 미래 첨단산업의 필수 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된 전략적 요충지다. 정부는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등 주요 자원 부국들과의 양자 및 다자 회담을 통해 원자재 공급망 안정화 협약을 구체화할 계획이다. 특히 현지 가공 산업 투자와 기술 이전을 연계한 상호 호혜적 협력 모델을 제시해 단순 자원 수입을 넘어선 장기적 파트너십을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다. 이는 중국 중심의 역내 원자재 가공 생태계에서 벗어나 공급망 경로를 다변화하는 데 필수적인 전략으로 꼽힌다.
국제정치학회 소속의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블록화된 국제 질서 속에서 한국과 같은 중견국은 다자주의 외교 틀을 최대한 활용해 선택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전문가는 미국 주도의 가치 기반 공급망 재편에 동참하면서도, 동남아와 중동, 중남미 등 자원 부국들과의 연대를 촘촘히 엮어 특정 국가의 정책 변화가 가져올 충격을 분산시키는 완충 지대를 만드는 것이 하반기 외교의 핵심 과제라고 짚었다. 안보 동맹과 경제적 실리를 조화롭게 운용하는 정교한 외교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라는 분석이다.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 공급망 협정의 이행 체계 마련도 다자외교 무대에서 다뤄질 주요 현안이다. 공급망 위기 발생 시 회원국 간 긴급 지원 체계를 가동하고 대체 공급선을 공동 발굴하는 메커니즘을 안착시키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정부는 다자회의 기간 회원국 통상 장관들과의 연쇄 접촉을 통해 공급망 조기경보시스템 연계 방안을 논의할 방침이다. 원자재 수급 불안 조짐을 사전에 포착해 공유함으로써 공급망 교란으로 인한 국내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취지다. 이는 단일 국가의 역량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글로벌 공급 충격을 다자간 협력으로 흡수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유럽연합과의 통상 외교 역시 하반기 다자외교 무대 이면에서 치열하게 전개될 전망이다. 유럽연합은 공급망 실사 지침과 핵심원자재법 등 환경과 인권을 연계한 새로운 통상 규범을 잇달아 시행하거나 입법화하고 있다. 국내 수출 기업들은 탄소 배출량 감축과 공급망 투명성 확보라는 이중 과제에 직면해 있다. 정부는 다자회의 계기에 열리는 주요국 정상회담에서 한국 기업들이 과도한 규제 부담을 안지 않도록 예외 조항 적용과 유예 기간 확보를 위한 통상 교섭에 집중할 예정이다. 규범 형성 단계에서부터 한국의 입장을 적극 반영하지 못할 경우 유럽 시장 내 수출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를 반영한 조치다.
통상교섭본부에서 다자통상을 담당해 온 한 전직 통상 관료는 통상 규범이 환경과 안보의 외피를 두르고 보호무역주의 수단으로 변질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관료는 다자외교 무대에서 주요국 정부와 고위급 소통 채널을 상시 가동하고, 유사한 입장을 가진 국가들과 공동 전선을 구축해 통상 장벽 도입 속도를 조절하거나 한국 기업의 기술 표준을 국제 규범에 반영하는 실리적 접근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외교적 담론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산업별 이해관계를 관철하는 정밀한 통상 협상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원자재 수급과 수출을 담당하는 기업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다. 반도체 패키징 소재를 수입해 가공·수출하는 중소기업 대표 김모 씨(52)는 원자재 수급처가 특정 국가에 묶여 있어 통상 환경이 요동칠 때마다 생산 계획 수립에 큰 차질을 빚는다고 토로했다. 김 씨는 중소기업 개별 역량으로는 대체 수입선을 뚫거나 현지 정보를 얻는 데 한계가 뚜렷하다며, 정부가 다자외교를 통해 주요 자원국과의 정부 간 통로를 열어주고 신뢰할 수 있는 공급망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해 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정부의 통상 외교 결과물이 현장 기업의 납기 안정성과 직결된다는 목소리다.
중국과의 관계 관리 역시 이번 다자외교 일정에서 결코 소홀히 다룰 수 없는 과제다. 정부는 한중일 3국 협력 체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한편, 다자회의를 계기로 대중 고위급 대화를 이어가며 갈등의 표면화를 막겠다는 방침이다. 한국무역협회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대중국 무역 구조는 과거 상호 보완적 관계에서 점차 경쟁적 관계로 재편되고 있으나, 배터리 원료와 범용 반도체 등 핵심 부품 영역에서는 여전히 상호 의존도가 높다. 이에 따라 공급망의 과도한 디커플링(탈동조화)을 방어하고 통제 가능한 수준의 디리스킹(위험 완화)을 유지하는 투트랙 접근법이 추진되고 있다.
국책연구기관의 한 무역통상 연구위원은 대외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는 공급망 다변화와 함께 공급망 회복력 확보가 병행되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 연구위원은 다자외교를 통해 새로운 자원 협력국을 발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비상시를 대비한 핵심 광물 비축 기지 확충과 국내 재활용 생태계 육성 같은 내부 역량 강화가 함께 맞물려야 외교적 협상력도 올라간다고 덧붙였다. 외부 통상 압박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외교적 다변화와 국내 산업 생태계의 복원력이 긴밀하게 연동되어야 한다는 분석이다.
정부는 이번 가을 다자외교 일정을 통해 각국과 맺은 양해각서와 협정들이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관계 부처 합동 공급망 점검 회의를 정례화하기로 했다. 외교부가 개척한 다자 협력 채널을 산업통상자원부와 기획재정부, 중소벤처기업부가 이어받아 민간 기업과의 계약 체결 및 현지 투자 지원으로 구체화하는 방식이다. 조달청과 한국광해광업공단을 통한 희소금속 비축량 확대 조치도 단계적으로 병행된다. 통상 당국은 국제 통상 환경 변화에 맞춰 주요 전략 품목의 수급 현황을 주 단위로 모니터링하고 이상 징후 발생 시 민관 합동 대응반을 가동할 예정이다.
외교부는 다자외교 일정 전반에 걸쳐 경제안보대사를 중심으로 한 현장 지원단을 운영하며 주요 기업 통상 담당자들과 실시간 소통 체계를 가동한다. 국가안보실 산하 경제안보비서관실을 중심으로 통상, 외교, 정보 라인이 참여하는 합동 공급망 태스크포스도 상시 가동 체제로 전환된다. 정부는 주요 다자회의가 마무리되는 연말까지 다변화된 공급망 파트너십의 세부 이행 로드맵을 확정하고, 자원 부국들과의 후속 실무 회담 일정을 확정해 발표할 방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