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10대 그룹 정기 공채 폐지 추세 속 직무 즉시 투입 가능한 경력형 인재 선호

국내 주요 대기업의 하반기 채용 시장에서 정기 공개채용 비중이 줄어들고 부서별 수시채용이 주류로 자리 잡았다. 과거 상반기와 하반기 특정 시점에 수백 명씩 신입사원을 일괄 선발하던 대규모 정기 공채 방식 대신, 부서별 결원이 발생하거나 특정 프로젝트에 즉시 투입 가능한 인재를 선별하는 수시채용 방식이 산업계 전반에 뿌리내렸다. 이에 따라 갓 대학을 졸업한 신입 구직자보다 인턴십이나 프로젝트 참여 등을 통해 실무 역량을 검증받은 이른바 중고 신입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한국경제인협회가 발표한 주요 기업 채용 계획 조사 결과에 따르면, 매출액 기준 상위 500대 기업 가운데 하반기 대규모 정기 공채만을 진행하겠다고 밝힌 기업의 비중은 매년 감소세를 보였다. 반면 수시채용을 병행하거나 수시채용만으로 신규 인력을 충원하겠다고 응답한 기업의 비율은 과반을 훌쩍 넘어섰다. 4대 그룹 중에서도 정기 공채 제도를 유지하는 곳은 단 한 곳에 불과하며, 대다수 주요 그룹사는 계열사별·본부별 상시 채용 시스템을 전면 도입했다. 이러한 흐름은 IT·플랫폼 및 바이오 업계를 시작으로 제조업, 금융권, 유통업계 등 전통적인 대기업군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채용 방식의 전환은 글로벌 경기 둔화와 산업 구조의 급격한 디지털 전환에 따른 기업들의 비용 절감 및 경영 효율화 요구와 맞닿아 있다. 대규모 공채는 수만 명의 지원자를 대상으로 서류 심사와 인적성 검사, 다단계 면접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된다. 채용 공고 게시부터 최종 합격자 발표까지 통상 3~4개월 이상이 걸려 급변하는 시장 수요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어렵다는 단점도 지적돼 왔다.
반면 선발된 인원이 현업에 배치된 이후 직무 적합도 문제로 조기 퇴사하는 비율이 높아지면서 기업들은 투자 대비 채용 효율성에 의문을 제기해 왔다. 입사 후 1년 이내에 퇴사하는 조기 퇴사자 비율이 20%를 웃돌면서 재채용과 재교육에 따른 간접 비용 손실이 가중됐다. 수시채용은 현업 부서가 선발 전 과정에 직접 참여해 즉시 성과를 낼 수 있는 직무 적합형 인재를 선별하므로 위험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경제활동인구조사 청년층 부가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청년층(15~29세)이 첫 취업에 성공하기까지 걸리는 평균 기간은 11.5개월로 집계됐다. 첫 직장을 잡기까지 1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는 구직자 비중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졸업 후 첫 직장에 들어가기까지 2년 이상 걸린 청년의 비율 역시 역대 최고 수준에 근접했다. 이는 기업들이 공채 문을 좁히고 직무 경험을 요구하면서 구직자들이 인턴십, 자격증 취득, 부트캠프 수료 등 스펙을 쌓는 기간이 길어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기업들의 채용 공고를 분석해 보면 직무 기술서(Job Description)가 과거보다 훨씬 세분화되고 구체화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과거 '경영지원', '영업관리' 등 포괄적인 직군으로 모집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퍼포먼스 마케터', '클라우드 인프라 엔지니어', '글로벌 공급망 관리(SCM) 전문가' 등 세부 실무 단위로 채용이 이뤄진다. 요구하는 직무 역량 역시 구체적인 소프트웨어 활용 능력이나 특정 프로그래밍 언어 숙련도 등으로 세분화됐다.
선발 평가 항목도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지원 자격과 평가 기준에서 학점이나 공인어학성적 같은 정량적 지표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대신 실무 포트폴리오, 직무 관련 프로젝트 수행 이력, 코딩 테스트 결과, 직무 역량 면접 등 실무 해결 능력을 직접 증명할 수 있는 항목 중심으로 재편됐다. 다자간 집단 토론이나 인성 위주의 면접 대신 실제 업무 상황을 가정한 과제 해결형 인터뷰와 직무 발표 면접이 보편화됐다.
취업 정보 플랫폼의 분석 통계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명확히 드러난다. 신입 채용 공고 중 1~2년 미만의 직무 경력을 우대하거나 요구하는 공고의 비중이 3년 전과 비교해 15% 포인트 이상 증가했다. 반면 신입만을 대상으로 한 순수 무경력자 우대 공고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이로 인해 중견·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에서 실무를 경험한 뒤 대기업 신입 채용에 다시 도전하는 중고 신입이 채용 합격자 명단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현상이 굳어졌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주요 기업 인사담당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직무 역량 인식 조사에서도 유사한 결과가 나타났다. 채용 평가 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항목으로 응답자의 60% 이상이 '직무 관련 실무 경험'을 꼽았다. 전공 적합성과 인턴 경험이 뒤를 이었으며, 봉사활동이나 해외 어학연수 등 전통적인 정량 스펙의 중요도는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기업들이 실무 투입 시점을 최소화할 수 있는 인력 선발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인사조직 전문가는 "기업 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신입사원을 채용해 장기간 교육훈련을 시킨 뒤 전력화하는 전통적인 인재 육성 모델이 한계를 맞이했다"며 "현업 부서에서는 별도의 온보딩(적응) 기간 없이 곧바로 실무에 투입될 수 있는 인재를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어 직무 중심 수시채용 기조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구직자들은 막연한 대기업 공채 준비에서 벗어나 자신이 진입하고자 하는 직무의 핵심 역량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경험을 축적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전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채용 컨설팅 전문가는 "수시채용 체제에서는 과거처럼 특정 월에 일괄적으로 원서를 접수하고 필기시험을 치르는 정형화된 준비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희망하는 산업군과 직무에서 주로 사용하는 협업 도구나 분석 툴, 최신 산업 트렌드를 주기적으로 파악하고, 이를 자신의 프로젝트 경험과 유기적으로 연결해 설득력 있는 스토리라인을 구축하는 역량이 당락을 가른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채용 시장의 변화는 청년 구직자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상시 채용 시스템에서는 채용 공고가 불시에 게시되고 마감 기간도 짧아 구직자들의 긴장 상태가 연중 내내 지속된다. 공채 시즌에 맞춰 집중적으로 준비하던 과거와 달리 상시로 공고를 확인하고 맞춤형 자기소개서를 준비해야 해 구직 피로도가 극심해졌다.
서울 소재 대학을 졸업하고 1년째 취업을 준비 중인 박모 씨(27)는 "과거에는 상반기와 하반기 대기업 공채 일정에 맞춰 서류와 인적성 검사를 일괄적으로 준비하면 됐지만, 지금은 기업마다 수시로 공고가 올라와 언제 뜰지 모르는 채용 공고를 매일 확인해야 한다"며 "기업들이 실무 경험을 요구하는데 정작 사회초년생이 실무를 경험할 수 있는 양질의 인턴 자리는 턱없이 부족해 진입 장벽이 너무 높게 느껴진다"고 토로했다.
경기 지역 제조업체에서 1년 6개월간 근무하다 대기업 이직을 준비 중인 이모 씨(29)는 "첫 직장에서 쌓은 프로젝트 경험과 직무 데이터를 기반으로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해 하반기 수시채용에 지원하고 있다"며 "대학 시절의 학점이나 어학 성적보다 실무에서 겪은 문제 해결 과정을 기술할 때 면접관들의 반응이 훨씬 긍정적이었다"고 말했다.
문과 계열 학과를 졸업한 뒤 마케팅 직무를 지망하는 정모 씨(25)는 "단순 자격증 취득보다는 데이터 분석 역량을 보여줄 수 있는 프로젝트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해 부트캠프와 직무 동아리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며 "정기 공채보다 선발 인원 자체가 적다 보니 매 전형마다 경쟁률이 높아 심리적인 압박감이 상당하다"고 전했다.
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수시채용의 확대는 기업 입장에서는 즉각적인 성과 창출과 비용 절감이라는 이점이 있지만, 노동시장 진입 단계의 청년들에게는 일자리 탐색 비용 증가와 경력 단절 불안을 가중시키는 양면성을 지닌다"며 "산학 연계를 통한 현장 실습 기회 확대와 직무 역량 강화 프로그램의 내실화 등 노동시장 진입 장벽을 낮추기 위한 제도적 보완책이 병행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취업 시장의 패러다임이 정기 선발에서 직무 수시 선발로 완전히 전환됨에 따라 청년 구직자들의 구직 활동 패턴도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공채 시즌에 맞춘 단기 집중형 취업 준비 대신, 직무별 상시 채용 동향을 상시 모니터링하고 맞춤형 경력 개발 경로를 설계하는 방식이 새로운 취업 준비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대학가 취업 지원 부서 역시 기존의 인적성 검사 특강이나 일반 자기소개서 첨삭 위주 지원에서 벗어나 직무 포트폴리오 제작 지도와 실무형 프로젝트 연계 지원으로 프로그램을 개편했다.
고용노동부와 한국고용정보원은 청년 구직자들의 실무 경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직무 기술서 기반의 채용 정보 제공 서비스를 고도화하고 있다. 워크넷(WorkNet) 등 공공 취업 포털을 통해 기업별·직무별 세부 필요 역량과 우대 조건을 표준화해 안내하고 있다. 또한 민간 기업과 협력해 직무 훈련과 현장 프로젝트를 결합한 미래내일 일경험 사업과 청년성장프로젝트를 확대 운영하고 있다. 직무 중심 수시채용에 대한 상세한 가이드라인과 직무 역량 자가진단 서비스는 고용24 홈페이지와 전국 대학일자리플러스센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