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유 상품 그대로 금융사 이동 가능… ETF 매매 편의성과 원리금보장 수익률 비교

기존에 운용하던 투자 상품을 해지하지 않고 그대로 다른 금융사로 옮길 수 있는 퇴직연금 실물이전 서비스가 본격화되면서 400조 원 규모에 달하는 퇴직연금 시장의 지형이 요동치고 있다. 과거에는 퇴직연금 계좌를 다른 금융회사로 바꾸려면 보유 중인 정기예금이나 펀드를 중도 해지하거나 전액 현금화해야 해 원금 손실이나 이자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실물이전 제도가 안착하면서 가입자들은 보유 상품의 만기를 기다리거나 환매 수수료를 물지 않고도 더 높은 수익률과 편리한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금융사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됐다. 원리금 보장 상품 중심의 안정적 운용에 머물렀던 과거와 달리, 적극적인 수익률 관리를 통해 은퇴 자산을 불리려는 4050 직장인들의 계좌 이동이 가속화되는 배경이다.

금융감독원과 고용노동부가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매년 두 자릿수 성장을 이어가며 대형 자산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제도 도입 초기에는 확정급여형(DB)의 비중이 압도적이었으나, 임금피크제 도입과 자율적인 자산 증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확정기여형(DC)과 개인형 퇴직연금(IRP)의 적립금 비중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특히 실물이전이 허용되는 대상이 확정기여형(DC) 간 이동과 개인형 퇴직연금(IRP) 간 이동, 그리고 동일 제도 내 가입자 간 이동으로 명확히 규정되면서 개인 가입자의 주도권이 대폭 강화됐다. 이에 따라 금융권에서는 고객을 지키려는 은행권과 수익률 및 상장지수펀드(ETF) 라인업을 앞세워 자금을 유치하려는 증권사 간의 치열한 점유율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시중은행들은 전국적인 오프라인 영업망과 높은 신뢰도를 바탕으로 퇴직연금 자산의 수성을 꾀하고 있다. 은퇴를 앞두고 원금 보존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중장년층 고객을 위해 시중금리 우대 상품과 맞춤형 원리금 보장 포트폴리오를 대거 확충했다. 비대면 자산관리 플랫폼을 고도화해 인공지능(AI) 기반의 로보어드바이저 일임 서비스를 강화하고, 전문 자산관리(WM) 인력을 지점에 배치해 일대일 대면 은퇴 설계 상담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아울러 타사 예금 상품을 한눈에 비교하고 편입할 수 있도록 제휴 금융사를 늘리는 등 은행 계좌 내에서도 안정적인 추가 수익을 거둘 수 있는 구조를 마련했다. 대형 은행들은 모바일 앱 개편을 통해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승인 상품에 대한 상세 정보를 직관적으로 제공하며 이탈 방어에 집중하고 있다.

반면 증권사들은 실시간 매매가 가능한 다양한 상장지수펀드(ETF) 라인업과 채권, 리츠(REITs) 등 비원리금 보장 상품의 다양성을 핵심 무기로 내세우고 있다. 모바일 트레이딩 시스템(MTS)의 편의성을 대폭 개선하고 퇴직연금 전용 수수료 무료 또는 인하 혜택을 전면에 내세웠다. 해외 지수를 추종하는 ETF나 월배당형 상품을 연금 계좌에 편입해 정기적인 현금 흐름을 창출하려는 투자 수요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전략이다. 증권업계는 연금 수령 단계에서 절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인출 설계 서비스와 함께 가입자별 투자 성향을 반영한 맞춤형 자산 배분 모델포트폴리오(MP)를 정기적으로 발송하며 가입자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보험업계 역시 장기 운용에 특화된 연금 지급 상품과 종신 연금 수령이 가능하다는 고유의 강점을 내세워 틈새시장 방어에 나섰다. 평생 동안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받기를 원하는 보수적 성향의 은퇴 준비자를 대상으로 금리연동형 보험 상품과 유가족 보장 기능이 결합된 하이브리드형 연금 설계를 제안하고 있다. 이처럼 업권별로 장단점이 뚜렷하게 갈리면서 가입자들은 자신의 투자 성향과 은퇴 시점, 위험 감내 수준에 맞춰 최적의 사업자를 저울질하는 양상이다.

퇴직연금 전문가는 실물이전 제도의 핵심이 단순한 금융사 변경을 넘어 가입자 스스로 포트폴리오를 재점검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 있다고 설명했다. 퇴직연금은 수십 년에 걸쳐 복리 효과를 누리는 장기 자산인 만큼 연 1~2%포인트의 수익률 차이가 은퇴 시점의 최종 수령액에서 수천만 원 이상의 격차를 만들어낸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과거처럼 퇴직연금을 방치해 두는 대신 디폴트옵션 지정 현황을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시장 상황에 맞춰 원리금 보장 자산과 실적 배당형 자산의 비율을 정기적으로 리밸런싱(자산 재배분)하는 능동적인 자세가 노후 자산 관리의 성패를 가른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퇴직연금 계좌 이전을 진행한 직장인 박모 씨(48)는 입사 이후 15년 동안 은행 확정기여형(DC) 계좌에 정기예금으로만 넣어두었던 적립금을 증권사로 이전했다. 박 씨는 연 2% 안팎의 예금 금리만으로는 물가상승률을 따라잡기 어렵다는 판단에 배당 성장형 상장지수펀드와 국채 위주의 채권형 펀드로 자산을 재구성했다. 박 씨는 기존에 가입해 두었던 예금 만기가 도래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실물이전이 가능해진 덕분에 중도 해지 이율을 적용받지 않고 고스란히 자산을 옮겨와 원하는 시점에 분할 매수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실물이전을 고려하는 가입자라면 사전에 반드시 확인해야 할 유의사항이 존재한다. 모든 금융 상품이 제한 없이 이전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물이전이 가능한 상품은 예금, 적금 등 원리금 보장 상품과 공모펀드, 상장지수펀드(ETF) 등 양쪽 금융사에서 모두 취급하고 있는 동일 상품에 한정된다. 만약 이전받을 금융사(수관회사)에서 취급하지 않는 특정 운용사의 사모펀드나 단독 판매 상품, 주가연계파생결합사채(ELB) 중 일부 상품을 보유하고 있다면 해당 자산은 현금화 과정을 거친 뒤 매도 대금 형태로 이전된다. 따라서 보유 자산 목록 중 어떤 상품이 실물 그대로 넘어가고 어떤 상품이 매도 대상인지 사전 조회를 통해 꼼꼼히 파악해야 한다.

또한 확정급여형(DB)에서 확정기여형(DC)으로의 전환이나 개인이 직접 개설한 개인형 퇴직연금(IRP)으로의 이전 시 발생하는 세무적·제도적 절차도 면밀히 살펴야 한다. 퇴직연금 계좌 간 이전은 원칙적으로 과세 이연 혜택이 유지되므로 이전 과정에서 퇴직소득세나 배당소득세가 원천징수되지 않는다. 그러나 계좌를 해지하여 일반 입출금 계좌로 수령한 뒤 재가입하는 방식을 취할 경우 기타소득세나 퇴직소득세가 부과될 수 있으므로 반드시 정식 실물이전 신청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상 가입자는 새로운 금융사를 방문하거나 해당 금융사의 비대면 모바일 앱을 통해 이전 신청서 한 장만 제출하면 기존 금융사를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원스톱으로 이전 처리를 완료할 수 있다.

금융감독원에 등록된 퇴직연금 사업자 공시를 활용하면 각 금융사의 장기 수익률과 총비용부담률을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 총비용부담률은 운용관리 수수료와 자산관리 수수료, 펀드 총보수 등을 모두 합산한 수치로, 장기 투자 시 수익률을 갉아먹는 주요 요인이 된다. 최근 다수 증권사가 개인형 퇴직연금(IRP)에 대해 운용·자산관리 수수료를 전액 면제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으므로 수수료 체계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이 유리하다. 아울러 디폴트옵션으로 지정된 상품들의 과거 1년, 3년 수익률 공시 자료를 확인해 해당 금융사가 위험도별로 적절한 성과를 내고 있는지도 핵심 판단 지표가 된다.

퇴직연금 실물이전 신청은 수관 금융회사의 지점이나 모바일 뱅킹, 홈페이지를 통해 접수할 수 있다. 신청이 접수되면 기존 금융회사에서 가입자 본인에게 전화나 문자메시지를 통해 이전 의사를 확인하고, 보유 상품의 이전 가능 여부와 매도 필요 자산에 대한 안내를 진행한다. 가입자가 최종 승인하면 통상 3영업일에서 5영업일 이내에 계좌 이관 및 잔고 반영이 마무리된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은 통합연금포털을 통해 가입자 개인이 보유한 모든 연금 계좌의 적립금 현황과 예상 연금 수령액, 사업자별 비교 공시 정보를 실시간으로 제공하고 있다. 가입자는 공인인증서나 간편인증을 통해 통합연금포털에 접속한 뒤 본인의 퇴직연금 적립금 내역과 운용 현황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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