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사회 진입 앞두고 연명의료결정법 안착과 완화의료 병상 격차 점검

임종을 앞둔 환자가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미리 밝혀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자가 200만 명을 넘어섰다.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를 넘어서는 초고령사회 진입을 목전에 두고 삶의 마지막 순간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웰다잉(Well-Dying) 문화가 사회 전반에 자리 잡고 있다. 치료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시술 대신 품위 있는 임종을 준비하려는 움직임은 고령층을 넘어 중장년층까지 폭넓게 확산하는 추세다.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된 이후 존엄한 삶의 마무리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호스피스 완화의료 병상과 지원 인프라는 여전히 지역별 편차를 보이고 있다.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통계에 따르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 등록한 누적 인원은 지속적으로 증가해 200만 명을 돌파했다. 제도가 처음 도입된 시점과 비교하면 작성자 수가 급격히 늘어난 수치다. 연령별로는 70대와 80대 이상 고령층의 참여율이 여전히 가장 높지만 최근에는 50대와 60대 중장년층의 자발적 신청도 가파르게 늘고 있다. 자신이 회생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을 때 가족에게 경제적·정신적 부담을 주지 않고 스스로 삶을 정리하겠다는 인식이 확산된 결과다.
연명의료결정제도는 치료 효과 없이 임종 과정만을 연장하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착용,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승압제 투여 등의 의학적 시술을 중단하거나 유보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장한다. 19세 이상 성인은 누구나 지정된 등록기관을 직접 방문해 충분한 설명을 들은 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할 수 있다. 작성된 문서는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의 연명의료 정보처리시스템에 데이터베이스로 등록돼 향후 담당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판단할 때 공식적인 근거로 활용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사회적 시선도 크게 달라졌다. 통계청이 발표한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바람직한 임종 문화로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임종'과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받지 않는 것'을 꼽은 응답자가 과반수를 차지했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각종 의료기기에 둘러싸여 생을 마감하기보다 익숙한 공간이나 편안한 완화병동에서 가족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싶어 하는 이들이 늘어난 것이다. 단순한 연명의료 거부를 넘어 유언장 작성, 장례 방식 사전 결정, 재산 정리 등 삶의 전반을 능동적으로 마무리하려는 움직임도 확대되고 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전문의는 임종기 환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리한 신체적 개입이 아니라 통증과 호흡곤란 같은 신체적 고통을 줄이고 정서적 안정을 돕는 돌봄이라고 설명했다. 완화의료는 환자의 생명을 단축하거나 억지로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인간답게 보낼 수 있도록 통증을 전문적으로 조절하고 심리사회적 지원을 제공하는 의료 서비스다. 과거에는 호스피스를 '치료를 포기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곳'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최근에는 삶의 질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의료 과정으로 인식하는 환자와 보호자가 많아졌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서비스는 크게 세 가지 형태로 운영된다. 호스피스 전문 병동에 입원해 돌봄을 받는 '입원형', 일반 병동이나 외래를 이용하는 말기 환자를 전담팀이 찾아가 상담과 돌봄을 제공하는 '자문형', 환자가 머무는 가정으로 전문팀이 정기적으로 방문해 관리하는 '가정형'이다. 환자의 신체 상태와 거주 환경에 따라 적합한 유형을 선택할 수 있도록 제도가 설계돼 있다. 암 환자뿐만 아니라 후천성면역결핍증, 만성 폐쇄성 폐질환, 만성 간경화 환자까지 완화의료 대상 질환의 범위도 점차 넓어지는 추세다.
그러나 제도의 확산 속도에 비해 호스피스 완화의료 인프라는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중앙호스피스센터 통계에 따르면 국내 호스피스 전문기관 병상 수는 수요에 비해 충분하지 않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특히 수도권과 대도시 지역에 전문기관이 집중돼 있어 지방 중소도시나 농어촌 지역의 말기 환자들은 호스피스 병상을 이용하기 위해 장거리를 이동하거나 대기해야 하는 불편을 겪는다. 호스피스 병상 부족으로 인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종 직전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을 전전해야 하는 사례가 발생하는 배경이다.
의료 현장에서는 전문 인력 부족 문제도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의사와 간호사뿐만 아니라 사회복지사, 성직자, 자원봉사자 등이 다학제 팀을 이뤄 신체적·정신적·영적 돌봄을 포괄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높은 업무 강도와 낮은 수가 체계로 인해 전문 인력을 지속적으로 확보하고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가정형 호스피스의 경우에도 방문 인력의 안전과 이동 시간 등을 고려할 때 보다 현실적인 지원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족의 임종을 호스피스 병동에서 지켜본 김모 씨(58)는 아버지가 말기 진단을 받은 뒤 통증 조절에 집중하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긴 덕분에 마지막 몇 주 동안 가족들과 차분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고 전했다. 김 씨는 당시에는 연명의료를 중단한다는 결정을 내리기까지 죄책감이 컸으나 전문 의료진의 상담을 통해 고통을 덜어드리는 것이 진정한 효도라는 점을 깨닫게 됐다고 덧붙였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직접 등록한 최모 씨(64)는 주변 친구들과 함께 보건소를 찾아 서류를 작성했다면서 스스로 마지막을 준비해 두니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볍고 현재의 삶에 더 집중하게 된다고 말했다. 최 씨는 나중에 의식이 없을 때 자녀들이 결정을 내리느라 힘들어하지 않도록 서류 작성 사실을 가족들에게도 미리 알리고 상의를 마쳤다고 밝혔다.
의료사회복지사는 연명의료 결정이나 웰다잉 준비는 단순히 노년층만의 과제가 아니라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함께 논의해야 할 소통의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평소에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문화를 깨고 환자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삶의 마지막을 보내고 싶어 하는지 건강할 때 미리 대화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가족 간의 사전 교감이 부족할 경우 환자의 임종 순간에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거나 결정에 대한 후회가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도 웰다잉 문화 조성을 위한 조례를 제정하고 지원 사업을 펼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각 지자체는 보건소와 노인복지관을 중심으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부스를 운영하고 노년층 대상의 웰다잉 교육 프로그램을 개설하고 있다. 교육 과정에는 단순한 서류 작성을 넘어 인생 회고록 작성, 사전 장례 의향서 작성, 유산 기부 안내 등 생애 마무리를 능동적으로 계획할 수 있는 다양한 내용이 포함된다.
웰다잉 문화의 확산은 장례 방식의 변화로도 이어지고 있다. 허례허식을 줄이고 고인과의 추억을 조용히 기리는 '작은 장례식'이나 매장 대신 화장 후 나무나 화초 주변에 유골을 묻는 '자연장'을 선호하는 비율이 꾸준히 늘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장사시설 수급 현황 자료에 따르면 국내 화장률은 90%를 넘어섰으며 자연장지 이용률도 매년 증가세를 기록하고 있다. 유가족에게 경제적 부담을 남기지 않고 환경을 보존하려는 실용적 선택이 늘어난 결과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은 국민건강보험공단 지사, 지역 보건소, 의료기관, 비영리법인 등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기관에서 진행할 수 있다. 신청을 원하는 사람은 신분증을 지참하고 등록기관을 직접 방문해야 하며 대리 작성이나 온라인 신청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 상담사와 일대일 상담을 통해 제도의 취지와 효력, 연명의료 시술의 종류, 의향서 변경 및 철회 방법 등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들은 뒤 서명하면 법적 효력이 발생한다.
등록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작성자 본인의 의사에 따라 언제든지 내용을 변경하거나 철회할 수 있다. 전국 등록기관의 위치와 운영 시간은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누리집이나 대표 전화 상담 창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보건복지부는 거동이 불편한 고령자를 위한 '찾아가는 상담소' 서비스도 단계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