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과율은 늘었지만 착공까지는 여전히 먼 길

서울 양천구의 한 노후 단지에 사는 최모 씨(52)는 최근 조합 설립 총회 소식에 반신반의했다. 안전진단 문턱이 낮아졌다는 뉴스를 접한 지 1년이 넘었지만 실제 입주까지는 여전히 까마득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는 "정비구역 지정이나 시공사 선정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고 말했다. 그가 사는 단지는 준공 30년을 넘긴 5층 저층 아파트로, 주차 공간 부족과 배관 노후로 주민 불편이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정부가 재건축 안전진단 기준을 완화한 지 1년 넘게 지나면서 실제 시장 반응을 점검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앞서 구조안전성 비중을 낮추고 주거환경·설비노후도 배점을 높이는 방향으로 안전진단 평가 기준을 바꿨다. 이전까지는 건물이 물리적으로 심각하게 위험해야만 재건축 문턱을 넘을 수 있었지만, 배관 노후나 주차난 같은 생활 불편 요소도 비중 있게 반영되도록 손질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구조안전성 배점 비중은 절반 이하로 낮아지고, 주거환경 배점은 그만큼 확대됐다.
이 조치 이후 안전진단을 통과하는 단지 수는 눈에 띄게 늘었다. 국토교통부 통계를 보면 완화 이전에는 조건부 재건축 판정을 받고도 적정성 검토 단계에서 발목이 잡히는 단지가 적지 않았지만, 기준 변경 이후에는 최종 통과까지 이르는 단지 비중이 확대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1990년대 초반 준공된 서울 목동, 상계동, 노원구 일대 대단지들이 잇따라 문턱을 넘으며 재건축 초기 단계에 진입했다. 일부 자치구에서는 안전진단 신청 자체가 크게 늘면서 관할 부서의 처리 물량이 밀리는 현상도 나타났다.
다만 안전진단 통과가 곧바로 착공이나 입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이번 점검에서 확인됐다. 안전진단은 재건축 절차의 첫 단추에 불과하다. 이후 정비구역 지정, 조합 설립, 시공사 선정, 사업시행인가, 관리처분인가 등 여러 단계를 거쳐야 실제 철거와 착공이 가능하다.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안전진단 통과 소식만 듣고 단기간에 새 아파트가 들어설 것으로 기대하는 매수자가 많은데, 실제로는 5년에서 10년 이상 걸리는 경우가 흔하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안전진단을 통과하고도 조합 설립 단계에서 주민 간 이견으로 수년째 표류하는 단지도 여러 곳 확인된다.
집값에 미친 영향도 지역별로 엇갈렸다. 안전진단을 통과한 단지 중 일부는 매물이 줄고 호가가 오르는 흐름을 보였지만, 이는 서울 강남권이나 목동처럼 입지가 우수한 지역에 집중된 현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반면 지방 중소도시나 수도권 외곽의 노후 단지는 안전진단 통과에도 불구하고 매수세가 크게 붙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부동산 연구위원은 "규제 완화가 전국적으로 균일하게 시세에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입지와 사업성이 뚜렷한 곳에서만 가격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국부동산원 통계에서도 서울 주요 재건축 단지의 매매가격 상승률이 인근 일반 단지보다 뚜렷하게 높게 나타난 반면, 지방 광역시 이하 지역에서는 안전진단 통과 발표 이후에도 거래량 변화가 미미한 곳이 많았다.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 역시 시장 참여자들의 주요 관심사로 남아 있다. 안전진단 문턱은 낮아졌지만 재건축으로 발생하는 초과 이익에 부담금을 매기는 제도가 그대로 유지되면서, 사업성이 낮은 단지는 여전히 추진 동력을 얻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조합원 입장에서는 안전진단 통과보다 부담금 규모가 더 큰 변수"라며 "일부 단지는 사업성 분석 결과가 나온 뒤 오히려 추진 속도가 늦춰지는 사례도 있다"고 전했다. 부담금 예상액이 수천만 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일부 조합에서는 사업 추진 여부를 두고 재투표를 검토하는 움직임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전문가들은 안전진단 완화의 효과를 절차 단축이 아닌 사업 착수 기회 확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한 도시계획 분야 연구위원은 "안전진단 완화는 재건축이 필요한 단지가 그 논의를 시작할 수 있게 문을 열어준 조치"라며 "실제 사업 속도는 조합 내부의 합의 수준, 시공사 선정 과정, 분담금 협상 등 다른 변수에 더 크게 좌우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안전진단만 통과하고 사실상 정체된 단지가 앞으로도 상당수 나올 수 있다"며 "행정 절차가 열렸다고 해서 주민 합의까지 저절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이런 상황에서 재건축 추진 단지를 매수하려는 수요자들 사이에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조언이 이어진다. 공인중개사 업계 관계자는 "안전진단 통과 발표만 보고 뛰어들기보다 정비구역 지정 여부, 조합 설립 인가 시점, 시공사 계약 조건까지 확인해야 실제 사업 진행 상황을 가늠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특히 초기 단계 단지는 매매 시 향후 추가 분담금이나 사업 지연 가능성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는 설명이다. 최근에는 안전진단만 통과한 초기 단지를 웃돈을 얹어 매수했다가 사업 지연으로 자금 계획에 차질을 빚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안전진단 완화 이후 실제 재건축 추진 현황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밝혔다. 관련 통계는 정비사업 통합정보마당 등을 통해 분기별로 공개되고 있으며, 지방자치단체별 정비구역 지정 현황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재건축을 염두에 둔 매수자들은 이런 공개 자료를 활용해 개별 단지의 진행 단계를 직접 확인해볼 수 있다. 일선 구청 관계자는 "안전진단 신청 단계부터 관리처분인가까지 각 단계별 소요 기간을 미리 파악하는 것이 실질적인 투자 판단에 도움이 된다"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