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보이스·메신저피싱 진화하는데 피해금 구제는 여전히 제자리걸음

은행 창구에서 "계좌를 즉시 동결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와도 돈이 실제로 피해자 손에 돌아오기까지는 길게는 수개월이 걸린다. 수법은 나날이 정교해지는데 구제 절차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이 금융권 안팎에서 꾸준히 나온다. 피해자들은 신고와 동시에 안도하지만, 그 안도감이 무색하게 환급까지는 또 다른 긴 싸움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최근 보이스피싱은 과거처럼 수사기관이나 금융기관을 사칭해 전화로 겁을 주는 방식에서 벗어나고 있다. 가족이나 지인을 사칭해 메신저로 접근하는 메신저피싱이 대표적이다. 자녀나 부모를 사칭한 메시지로 신뢰를 쌓은 뒤 급전이 필요하다며 송금을 유도하는 식이다. 여기에 인공지능 음성합성 기술을 악용한 이른바 딥보이스까지 등장하면서 실제 가족의 목소리와 구분이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경찰청에 따르면 메신저를 이용한 사기 수법은 해마다 신고 건수가 늘고 있으며, 조직 간 분업화로 콜센터 역할과 자금 인출책, 송금책이 철저히 분리돼 추적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최근에는 악성 애플리케이션을 휴대전화에 설치하도록 유도해 피해자의 통화 자체를 가로채는 수법도 늘고 있다는 것이 경찰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 경우 피해자가 금융기관 고객센터로 전화를 걸어도 실제로는 범죄 조직이 운영하는 가짜 상담원과 연결되는 탓에 피해 사실을 인지하는 시점 자체가 늦어진다.

피해자가 사기를 인지한 직후 할 수 있는 1차 조치는 해당 계좌에 대한 지급정지 요청이다.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피해자는 금융회사나 112에 즉시 지급정지를 신청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지급정지가 피해금 전액 회수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기 조직은 피해금을 입금받는 즉시 여러 차명계좌나 가상자산 거래소로 분산 이체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세탁하는데, 신고와 지급정지 사이에 걸리는 몇 시간 혹은 며칠 사이에 돈은 이미 다른 계좌로 넘어간 뒤인 경우가 많다. 특히 야간이나 주말에 피해가 발생하면 영업시간 외 신고 접수와 실제 조치 사이의 공백이 더 길어져 피해 확산을 막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급정지가 이뤄진 뒤에도 절차는 복잡하다. 금융회사는 피해 신고가 접수되면 해당 계좌에 대한 채권소멸절차를 개시하고, 이 사실을 공고한다. 공고 기간 동안 이의 제기가 없으면 피해금 환급이 결정되는 구조인데, 이 공고 절차 자체가 통상 수 주에서 수개월이 걸린다. 여기에 사기에 이용된 계좌 명의인이 자신도 피해자라며 이의를 제기하면 환급 절차는 전부 중단되고 민사소송 등 별도 법적 다툼으로 넘어간다. 통장을 빌려주거나 대여한 명의인과 실제 피해자 사이의 책임 소재를 가리는 과정에서 시간이 추가로 소요되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는 자신이 가해자가 아님에도 명의인과 법적 다툼을 벌이는 처지에 놓이고, 변호사 선임 등 추가 비용까지 떠안는 사례도 적지 않다.

금융감독원 관계자에 따르면 피해 환급 신청 건수 대비 실제 전액 환급으로 이어지는 비율은 높지 않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미 인출되거나 해외로 송금된 자금, 가상자산으로 전환된 자금은 추적과 회수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특히 가상자산 거래소를 거쳐 해외 지갑으로 넘어간 자금은 국내 수사기관의 영장이나 공조 요청만으로는 압류조차 쉽지 않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피해 신고가 접수된 시점에는 이미 돈의 흐름이 끝난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지급정지는 추가 피해를 막는 효과는 있지만 이미 빠져나간 돈을 되돌리는 수단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고 말했다.

최모 씨(52)는 지난여름 아들을 사칭한 메신저 메시지를 받고 수백만 원을 송금했다가 뒤늦게 사기임을 알아챘다. 신고 직후 은행에 지급정지를 요청했지만 담당 직원으로부터 "이미 다른 계좌로 여러 차례 이체된 상태라 전액 회수는 장담하기 어렵다"는 답을 들었다. 최 씨는 이후 몇 달째 환급 결정을 기다리고 있지만 명의인 측의 이의 제기로 절차가 늦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환급 결정이 늦어지는 사이 생활비를 마련하느라 추가로 대출을 받아야 했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피해자인 이모 씨(34)는 딥보이스로 추정되는 음성 통화를 받고 가족을 사칭한 상대에게 속아 돈을 보냈다가, 신고 접수 과정에서 경찰과 금융회사를 오가며 서류를 반복 제출해야 했던 경험을 전했다. 이 씨는 "분명히 가족 목소리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기술로 흉내 낸 것이었다"며 "신고 이후에도 같은 설명을 여러 기관에 반복해야 해서 지치는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신종 수법에 대응하려면 사후 구제보다 사전 차단 체계 강화가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한 변호사는 "현행법은 계좌 지급정지와 채권소멸절차 중심으로 설계돼 있어 자금이 가상자산이나 해외로 넘어간 경우에는 사실상 손을 쓰기 어려운 구조"라며 "금융회사 간 실시간 정보 공유와 이상거래 탐지 시스템 고도화가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 수사 관계자는 "조직이 대포통장과 대포폰을 활용해 추적을 피하는 수법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어 피해 신고 즉시 모든 금융기관이 연동된 경보 체계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한 금융소비자단체 관계자는 "명의인의 이의 제기로 환급이 장기간 보류되는 구조 자체를 손봐야 한다"며 "피해자 보호와 명의인의 권리 보호를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 신속한 심사 절차가 마련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금융당국은 메신저피싱과 음성합성 기술을 악용한 사기에 대응하기 위해 은행권과 함께 본인 확인 절차를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가족이나 지인을 사칭하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는 해당 연락처로 바로 답하지 말고 별도의 전화번호나 직접 통화로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기본적인 예방법으로 꼽힌다. 피해가 의심되면 송금 즉시 거래 은행과 112에 동시에 신고해 지급정지를 요청하는 것이 그나마 피해 확산을 줄이는 방법이다. 출처가 불분명한 애플리케이션 설치 요구나 원격 제어 프로그램 설치 요청을 받으면 즉시 거절하고 통신사나 경찰에 문의하는 것도 권고된다. 경찰청과 금융감독원은 피해 신고 접수 창구를 통합 운영하며 관련 상담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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