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동화를 신고, MP3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고, 이어폰을 귀에 꽂는 일상적인 행동이 K팝 팬에게는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음악과 세계관을 경험하는 방식이 되고 있다. 음악을 담아 듣고 소장하던 앨범은 키링과 이어폰, 운동화 같은 실용 상품과 결합하며 팬들의 일상으로 들어왔다. 머치(MERCH) 앨범은 새로운 물건을 내놓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앨범의 콘셉트와 아티스트의 서사를 상품에 담고, 사용 과정까지 음악 경험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다. 다만 소장 가치와 희소성만으로 지속적인 상품성을 보장할 수는 없다. 기획사들은 실제 제품으로서의 품질과 사용성, 앨범의 본질인 음악과의 연결을 함께 고려하고 있다.
소장품에서 일상용품으로 넓어진 앨범
머치는 머천다이즈(Merchandise)의 줄임말로, 아티스트나 브랜드와 관련된 상품을 뜻한다. 머치 앨범은 여기에 음악 콘텐츠를 결합한 형태다. CD 대신 NFC나 QR코드로 음악을 감상할 수 있고, 상품은 키링이나 이어폰, 패션 소품처럼 사용할 수 있다. SM엔터테인먼트 소속 NCT WISH는 2024년 3월 싱글 ‘WISH’ 발매 당시 캐릭터 키링 형태의 위츄 버전을 내놨다. 이후 미니 1집 ‘Steady’에는 카메라 모양 키링을, 2025년 미니 2집 ‘poppop’에는 가방을 포함한 위츄 앨범을 선보였다. 아티스트 캐릭터를 앨범에 연결해 상품의 형태를 확장한 사례다.
음악 감상 기기를 상품으로 만든 시도도 이어졌다. 에스파는 2024년 5월 정규 1집 ‘Armageddon’의 특별 버전에 투명한 디자인의 CD 플레이어와 유선 이어폰, 포토카드를 담았다. 가격은 14만5000원이었고, 예약 판매 당시 품절됐다. JYP엔터테인먼트의 엔믹스는 2025년 미니 4집 ‘Fe3O4: FORWARD’ 셸 버전에 16GB MP3 플레이어를 포함했다. 여섯 가지 멤버별 디자인 가운데 하나가 무작위로 제공되고 포토카드와 디지털 사진도 함께 구성됐다. 앨범을 구입한 뒤 음악을 듣는 행위와 상품을 사용하는 행위를 한 제품 안에 결합한 것이다.
JYP 관계자는 “새로운 형태의 머치 앨범을 공개할 때마다 팬 분들의 반응이 매우 뜨겁다”고 말했다. 회사는 머치 앨범을 해당 활동과 콘셉트의 희소성을 담은 한정반으로 규정하고, 소장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초도 물량 이후 추가 제작을 하지 않는 기조로 운영한다고 밝혔다. 신선한 형태와 한정된 수량이 구매 동력이 될 수 있지만, 실제로 사용하는 제품이라면 일반 소비재처럼 상품 자체의 매력도 요구된다.
콘셉트를 담되 품질과 사용성도 따진다
SM 크리에이티브 비주얼의 김욱 총괄 디렉터와 조우식·조수연·이지홍은 NCT JNJM의 컨버스 운동화 앨범에 대한 팬 반응을 전했다. 이들은 신발이 앨범으로 제작된 점이 신선하고 놀랍다는 반응이 있었고, 응원하는 아티스트의 앨범이 차별화된 형태로 주목받는 데 팬들이 만족감과 자부심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회사는 아티스트의 이름이나 한정판이라는 이유만으로 상품에 가치를 부여하기보다 제품 자체의 완성도와 사용 경험을 함께 갖춰야 한다고 밝혔다. 형태의 특별함에 더해 품질과 편의성도 상품 가치의 일부라는 설명이다.
제작 과정도 일반 음반 패키지와 다르다. 디자인과 인쇄물 제작에서 끝나지 않고 제품의 기능과 내구성을 확인해야 한다. 특히 전자기기처럼 작동하는 제품을 앨범에 결합하면 샘플 검수와 양산 과정이 길어질 수 있다. JYP 관계자는 전자기기나 실용 기능이 들어가는 머치 앨범의 품질 관리 기준을 높게 적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물 샘플 검수를 일반 지류 상품보다 배로 반복하고, 작동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작은 문제도 찾아 수정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양산과 품질 검증에 상당한 시간이 들어 머치 앨범을 전체 제작 프로젝트에서 가장 먼저 기획하고 제작에 들어간다고 설명했다.
SM 관계자는 “머치 앨범은 소장하는 앨범인 동시에 실제로 사용하는 제품인 만큼, 아티스트의 이름이나 한정판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치를 부여하기보다 제품 자체로도 충분한 매력과 완성도를 갖춰야 한다. 새로운 형태에서 오는 특별함은 물론, 품질과 사용 경험에 대한 만족도까지 충족되어야 지속적인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하이브 관계자는 품목별 특성과 사용성을 고려해 가격과 품질을 검토하며, 상품 유의사항과 교환 관련 사항은 상품별 기준에 따라 안내한다고 밝혔다.
음악과 서사를 상품의 형태로 구현
머치 앨범의 상품은 앨범 제목이나 곡의 메시지에서 출발하기도 하고, 아티스트의 관심사나 실제 사용하는 물건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JYP에 따르면 엔믹스의 MP3 셸 버전은 ‘Fe3O4’ 시리즈의 마지막 앨범에 담긴 연대와 화합의 메시지를 음악을 함께 듣는 경험으로 표현하려는 기획이었다. 시리즈는 ‘BREAK’에서의 도약, ‘STICK OUT’의 시행착오를 거쳐 세상으로 출항하는 서사를 담았다. 출항이라는 상징에 맞춰 외형을 조개 모형으로 만들었고, 초기 단계부터 제조사 아이리버와 디자인·색상·기능 사양을 조율했다. 제작 기간이 긴 점을 고려해 기획도 일찍 시작했다.
NCT JNJM의 컨버스 운동화와 NFC 결합 앨범은 두 멤버가 만난 듀오 프로젝트를 신발의 형태와 연결했다. SM 관계자들은 서로 다른 두 존재가 만나 하나의 완성된 형태를 이룬다는 의미에서 출발했고, 컨버스의 자유롭고 쿨한 이미지와 두 사람의 매력을 연결했다고 밝혔다. 팬들이 신발을 신고 새로운 시작에 함께 발걸음을 내딛는다는 뜻도 담았다. 빌리프랩의 아일릿은 미니 4집 ‘MAMIHLAPINATAPAI’의 괄사 세라믹 오브제 버전을 수록곡 ‘GRWM’의 ‘준비하는 순간’이라는 메시지에서 기획했다. 셀프 케어를 떠올리게 하는 괄사를 선택하고, 강아지 실루엣 디자인으로 다른 수록곡 ‘paw, paw!’의 분위기도 반영했다.
상품의 형태가 앨범의 전부는 아니다. 르세라핌은 2025년 10월 싱글 1집 ‘SPAGHETTI’에서 사전 프로모션부터 디자인과 무대 세트까지 요리라는 키워드를 이어갔다. 마트에서 판매될 법한 스파게티 상자 모양 패키지와 요리책처럼 구성한 포토북, 포토카드, ‘먹지 마세요’라는 문구가 적힌 실리카 젤 포장을 활용했다. 일반적인 형태의 실물 앨범도 포장을 열고 구성품을 살펴보는 과정에 콘셉트를 반영할 수 있다는 사례다. 머치 앨범의 경우에도 품목을 먼저 정하기보다 음악과 서사를 어떻게 구현할지를 기획 기준으로 삼는다는 게 각 기획사의 설명이다.
판매량 너머, 구매 이후의 가치
K팝 실물 앨범 시장은 빠르게 성장한 뒤 감소와 반등을 거쳤다. 한터차트 집계 기준 연간 판매량은 2023년 1억 장을 넘은 뒤 2024년과 2025년 2년 연속 줄었다. 2026년 상반기에는 방탄소년단을 비롯한 대형 아티스트의 활동과 신인들의 성장 등에 힘입어 역대 상반기 최고 판매량을 기록했다.
| 기간 | 피지컬 앨범 판매량 |
|---|---|
| 2017년 | 1379만 장 |
| 2019년 | 1857만 장 |
| 2023년 | 1억 장 이상 |
| 2024년 | 8695만 장 |
| 2025년 | 8624만 장 |
| 2026년 상반기 | 4953만 장 |
앨범을 여러 버전으로 내거나 포토카드를 무작위로 넣는 방식, 팬사인회 응모를 위한 구매는 한 사람이 같은 앨범을 여러 장 사는 배경이 돼 왔다. 구성품을 제외한 CD와 앨범이 보관되거나 처분되고 대량 구매한 앨범이 버려지는 문제도 제기됐다. 환경단체 케이팝포플래닛은 2024년부터 불필요한 음반 구매를 유도하는 마케팅을 줄이라고 요구하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기획사들은 재생 용지와 간소화된 포장, QR코드·NFC 기반 플랫폼 앨범 등을 내놨지만, 구성품 수집이나 이벤트 응모를 위한 반복 구매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과잉 소비 문제는 남을 수 있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SM 관계자는 “음악을 소유하고 아티스트의 세계관과 콘셉트를 물리적으로 경험하려는 수요는 계속 존재할 것이며 머치 앨범은 이러한 경험을 넓히는 하나의 선택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모든 앨범이 머치 앨범을 지향할 필요는 없고, 아티스트의 음악과 정체성에 따라 적합한 형태가 다르다고 밝혔다. JYP는 디지털 요소와 머치 카테고리에서 이동성·편의성·체험성·감성을 고려하고, 소비자가 앨범에 두는 개념과 가치를 주기적으로 점검한다고 설명했다. 소장품과 CD·LP, 일상에서 쓰는 상품은 각기 다른 구매 이유를 갖는다. 기획사들은 음악을 전하는 수단이라는 앨범의 본질 아래 다양한 형태를 검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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